시애설화(屍愛說話)의 하나이다. 신라 『수이전』에 있으며,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 실려 전한다. 『대동운부군옥』에 전하는 「선녀홍대(仙女紅袋)」는 이 이야기의 일부이다.
최치원은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과거에 장원하고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어느 날 표수현 남계에 있는 초현관에 놀러갔다가 쌍녀분이라는 무덤을 보고 석문시(石門詩)를 지어주고 외로운 혼백을 위로했다.
시를 짓고 관에 돌아오자 달이 밝고 바람이 좋은데 문득 아름다운 여자가 손에 붉은 주머니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시를 지어준 무덤에 살고 있는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보답하는 선물이라며 글귀가 쓰인 붉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뒤쪽에 쓰인 글에 그와 가까이 심사를 터놓고자 하는 뜻을 전하므로 기뻐하여 취금이라는 그 여자에게 답시를 써 보냈다. 취금이 시를 가지고 사라지자 잠시 후 문득 향내가 나며 두 여자가 손에 연꽃을 들고 들어왔다. 그가 꿈인가 놀라고 기뻐하며 시를 짓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표수현 초성의 향호(鄕豪)인 장씨의 딸로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였을 때 각각 소금장수와 차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두 낭자는 이 혼처가 불만스러워 우울하게 보내다가 요절했으며, 오늘 최치원을 만나 심오한 이치를 논하게 되어 다행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무덤에 묻힌 지 오래인데 어찌 지나는 영웅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붉은 소매의 여인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비부뿐이었는데, 오늘 다행히 수재를 만나 기쁘다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술을 권하며 달[月]과 바람[風]을 시제 삼아 시를 짓고 시비 취금의 노래를 들으며 즐겼다.
최치원이 좋은 짝을 만났으니 인연을 이룸이 어떠냐고 하여 세 사람은 한 이불 아래 견권지정(繾綣之情)을 나누었다. 날이 새자 두 낭자는 놀라며 천년의 한을 풀었다고 사례하며 시를 지어주었다. 이에 최치원은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뒷날 이곳에 오게 되면 거친 무덤을 살펴 달라 부탁하고 두 낭자가 사라지자, 그는 무덤으로 달려가 두 사람을 애도하는 장시를 지었다. 뒤에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는 여러 곳을 주류하다가 마지막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