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禑王) 때 왜구 1,000여 명이 옥주(沃州: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보령(保寧) 등을 함락시키고 계룡산을 근거로 약탈을 감행하자 문달한(文達漢)·안덕흥(安德興) 등과 함께 공주(公州)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뒤에 지문하사(知門下事)로서 진봉사(進奉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으나 권신 염흥방(廉興邦)에게 뇌물을 바쳐 전 문하평리(門下評理) 홍상재(洪尙載)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 뒤 1383년(우왕 9) 지문하사로 양광도도안무사(楊廣道都安撫使)를 겸임하였다.
1388년 팔도도통사조전원수(八道都統使助戰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감행하였고, 창왕(昌王)이 즉위한 뒤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까지 이르렀으나 곧 사망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봉되었으며, 다시 1393년(태조 2) 회군공신을 재책봉할 때 3등공신에 추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