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4년(공민왕 13) 적신(賊臣)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1만의 군사로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포위하자,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싸움에 참전하여 적을 패퇴시켰다. 1374년 지병마사(知兵馬使)를 역임하였으며, 1385년(우왕 11) 왜구가 함주(咸州: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홍원(洪原: 함경남도 중남부에 위치)·북청(北靑) 등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 심덕부(沈德符), 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 등과 더불어 홍원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워 모두 패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같은 해 5월 왜선(倭船) 28척이 축산도(丑山島: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침입하자 이화(李和)와 더불어 교주삭방강릉도조전원수(交州朔方江陵道助戰元帥)가 되었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봉주(鳳州: 지금의 황해도 봉산)에 귀양 갔으나 그 해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창왕의 생일을 맞아 방면되어 시골로 내려갔다.
1389년(공양왕 1) 밀직사(密直司)가 되었으나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1390년에는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반이성계파로 지목된 뒤 감옥에 갇혔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고려시대 관료들의 회유책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