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지(誠之), 호는 죽계(竹溪). 안구(安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참찬 안지귀(安知歸)이고, 아버지는 판서 안침(安琛)이다. 어머니는 증 좌찬성 이수철(李守哲)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지었는데, 성종은 일찍이 안처성이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장한가(長恨歌)」를 착오 없이 암송하는 것을 시험하고 글재주에 놀랐을 정도였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150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1507년 부교리(副校理), 1508년 지평(持平)을 거쳐 같은 해 시독관(侍讀官)으로 경연에 참석하였다.
이 때 왕실의 대비전에서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대자사(大慈寺)를 수리하도록 하였다. 안처성은 홍문관을 비롯한 시독관 이자화(李自華), 지사(知事) 신용개(申用漑) 등과 함께 몇 차례에 걸쳐 대자사 중수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
1511년 장령(掌令)으로 대간에 재직할 때 공론(公論)을 저지해 억제한 일로 탄핵을 받아, 1512년 다시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1513년 전라도·충청도의 암행어사가 되었고, 이후 선공감정(繕工監正)·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대간에서는 안처성과 안지(安智) 문제로 몇 차례 탄핵소를 올렸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 때 사신(史臣)이 안처성의 품성을 논하기를, “본래 정직하지 못해 남이 옳다는 것은 그르다 하고 남이 나쁘다는 것도 좋다고 하였다. 소박하고 우직해 꾸밈이 없이 나라 일에 마음을 다했으나 이극돈(李克墩) 같은 자의 죄를 벗겨주려고 노기까지 띠면서 동렬(同列)을 비방하였다.”고 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