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140㎝, 너비 68㎝.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683년(숙종 9년)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倭館)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 가지를 제정,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윗 부분은 반달모양이고 재료는 화강석으로 용두산공원에 세워져 있으나, 1979년부터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 경내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607년(선조 40) 부산의 두모포(豆毛浦: 동구 수정동)에 왜관을 설치, 대마도 관인(官人)과 항거왜인(恒居倭人)이 거주하게 되고 또한 일본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양국 상인들의 접촉도 많아졌다.
따라서 국금(國禁: 나랏법으로 금함.)이 무시되고, 밀무역·잡상행위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따르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일본측과 여러 차례의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두모포에서 초량(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후 그 경역(境域: 경계가 되는 구역)이 더 넓어져 왜인들의 범법행위도 많아지고 다양해져 피해가 심하였다.
이에 168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이 돌아올 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섭관계를 위임받고 있던 대마도주와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고, 이것을 한문과 일문(日文)으로 각각 비석에 새겨 조선측은 수문(守門) 안에, 일본측은 왜관의 경계지역에 세워서 알리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금하고 있는 경계선 밖으로 함부로 나오는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② 노부세(路浮稅: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 진 빚, 倭債)를 주고받는 것을 현장에서 잡으면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③ 저자를 열 때 각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물건을 사고 파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할 것.
④ 5일마다 물건들을 들여올 때 색리(色吏: 빗아치-어떤 분야에서 일을 맡아보던 사람)·고자(庫子: 참고지기)·소통사(小通事)들은 일본인들을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⑤ 피차에 죄를 범한 사람은 모두 관문 밖에서 집행할 것. 관내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만약 일이 생겨 관외로 나가야 할 때는 왜관의 관리에게 보고하고 통행증을 가지고 조선 측의 훈도(訓導: 사역원의 정구품 벼슬)에게 보임으로써 왕래할 수 있다. 각 조의 제찰(制札: 금제의 문서나 게시)을 글로 써서 세워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