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개건비 ()

목차
관련 정보
온정 개건비
온정 개건비
서예
유적
국가유산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조선후기 동래부사 강필리의 온정 개축 관련 송덕비.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부산광역시
종목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1972년 06월 26일 지정)
소재지
부산 동래구 금강로124번길 23-17 (온천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조선후기 동래부사 강필리의 온정 개축 관련 송덕비.
내용

높이 144cm, 너비 61cm.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동래의 온정(溫井:온천)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766년(영조 42)에 화강석으로 세운 비석으로 용각(龍閣)내에 보존되어 있다.

동래온천은 옛부터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한때는 욕객들의 편의를 위해 역마를 배치하고 온정 부근에 관립여관인 온정원(溫井院)을 두어 각지에서 몰려드는 욕객들을 수용하였다.

조선 중기에 들어 동래온천에 우리 나라 사람뿐 아니라 일본인까지 몰려오자 온천수원의 확보와 욕조의 정비, 욕사(浴舍)의 증축이 필요하였다.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자연 용출의 온천은 원수(源水)의 많은 사용에 따라 말라버렸으며, 새로운 천원(泉源)의 굴착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동래온천에 대한 대대적 정비와 보수가 뒤따르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 동래부사 김홍복(金洪福)이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고천원(古泉源) 부근에 새로운 천원을 파 온정가(溫井家) 7칸과 행랑 5칸을 건립하였으나, 이것 역시 용출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1729년(영조 5)에 부사 이광세(李光世)가, 1740년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계속 정비·보수작업을 하였으나 온천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후 욕객들이 더욱 많아지자 동래부사 강필리는 옛 천원 근방을 굴착하여 수량이 풍부한 새 천원을 얻게 되었으며, 큰 돌로 탕 두 개를 만들어 남녀가 별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9칸의 욕사를 새로이 짓고 비석을 세워 강필리가 온정을 개건한 목적과 그 규모 및 공적을 새겼다.

이 비석은 동래온천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이때부터 동래온천사상 공중 욕탕식의 남녀 별탕이 본격화되었다. 온정개건비 앞에 현재 남아있는 석조(石槽)는 남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전한다.

참고문헌

『부산의 문화재』(부산직할시, 1982)
『부산시사』(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