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144cm, 너비 61cm.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동래의 온정(溫井:온천)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766년(영조 42)에 화강석으로 세운 비석으로 용각(龍閣)내에 보존되어 있다.
동래온천은 옛부터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한때는 욕객들의 편의를 위해 역마를 배치하고 온정 부근에 관립여관인 온정원(溫井院)을 두어 각지에서 몰려드는 욕객들을 수용하였다.
조선 중기에 들어 동래온천에 우리 나라 사람뿐 아니라 일본인까지 몰려오자 온천수원의 확보와 욕조의 정비, 욕사(浴舍)의 증축이 필요하였다.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자연 용출의 온천은 원수(源水)의 많은 사용에 따라 말라버렸으며, 새로운 천원(泉源)의 굴착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동래온천에 대한 대대적 정비와 보수가 뒤따르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 동래부사 김홍복(金洪福)이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고천원(古泉源) 부근에 새로운 천원을 파 온정가(溫井家) 7칸과 행랑 5칸을 건립하였으나, 이것 역시 용출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1729년(영조 5)에 부사 이광세(李光世)가, 1740년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계속 정비·보수작업을 하였으나 온천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후 욕객들이 더욱 많아지자 동래부사 강필리는 옛 천원 근방을 굴착하여 수량이 풍부한 새 천원을 얻게 되었으며, 큰 돌로 탕 두 개를 만들어 남녀가 별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9칸의 욕사를 새로이 짓고 비석을 세워 강필리가 온정을 개건한 목적과 그 규모 및 공적을 새겼다.
이 비석은 동래온천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이때부터 동래온천사상 공중 욕탕식의 남녀 별탕이 본격화되었다. 온정개건비 앞에 현재 남아있는 석조(石槽)는 남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