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양태환(梁泰煥)·양삼성(梁三成). 황해도 연백 출신.
1911년 배천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를 졸업하였다. 이어 조선보병대를 거쳐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는데, 우유·신문 배달과 인력거를 끌며 고학하였다.
1921년 2월 이른바 참정권운동을 표방하여 중의원의원선거법시행 청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경에 온 국민협회(國民協會) 회장이며 조선총독부중추원 부참의 민원식(閔元植)의 처단을 결의하였다.
그 해 2월 16일 이기령(李基寧)이라는 가명으로 동경역전호텔(철도호텔 혹은 제국호텔)로 민원식을 방문, 참정권운동의 허구성과 친일매국행위를 질책한 뒤 품고 있던 단도로 처단하였다.
거사 후 상해로 탈출하고자 그해 2월 24일 나가사키항[長崎港]에서 상해행 일본여객선에 승선하려다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동경으로 호송되었다. 1921년 6월 30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 1922년 5월 4일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재판과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하고 활달한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동경감옥 등지에서 복역한 뒤 1933년 2월 11일 출옥하였다. 1950년 6·25사변 때 퇴각하던 북한군에 납치되어 처형당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