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위남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이후 중부참봉에 임명되지만 모친상을 치르다 병으로 사망한 문신.
이칭
  • 이칭경섭(景涉)
인물/전통 인물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574년(선조 7)
  • 사망 연도1633년(인조 11)
  • 본관제주(濟州)
  • 주요 관직중부참봉(中部參奉)
  • 관련 사건정묘호란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중환 (전 동아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이후 중부참봉에 임명되지만 모친상을 치르다 병으로 사망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양응기(梁應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산립(梁山立)이고, 아버지는 훈련원첨정 양인용(梁仁容)이다.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홍진(洪縝)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남달랐고 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서한 지 10여 년만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양위남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업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더불어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돌려 100여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여산(礪山)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재배한 뒤 돌아왔다. 뒤에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임명되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극진히 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조정에서는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정려를 내렸다.

참고문헌

  • - 『명재유고(明齋遺稿)』

  • - 『남계집(南溪集)』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