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411년에 창건하여 문묘기능과 함께 유학을 연구 · 강론하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오다가 1909년 학제가 개혁됨에 따라 타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문묘기능만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천군(陽川郡)이 김포군(金浦郡)에 합군(合郡)되면서 양천향교가 김포향교에 통합되었다.
그 후 1945년 광복과 함께 김포향교에서 분리 · 독립되면서 관내 유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교궁(校宮重修)을 중수하고 비품(備品) 등을 구비하게 되었으며, 이어 1969년에 대성전(大聖殿)과 외삼문(外三門)을 보수(補修)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 동안 향교 복원공사 계획을 수립하고 향교의 재산 처분과 복원사업 승인을 얻어 1980년 11월에 복원공사에 착공, 1981년 8월에 완공을 보았다. 또한 향교 비품도 장만하여 향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향교가 위치한 이곳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공암(孔岩)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에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1310년에 양천현(陽川縣)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그 후 1895년에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포군에 병합되었고 1963년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양천향교에서는 대성전에 오성(五聖)과 송조 4현(宋朝四賢), 그리고 우리 나라 십팔현(十八賢)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