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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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구릉이나 해안에 위치하여 연기 · 횃불 등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을 지칭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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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구릉이나 해안에 위치하여 연기 · 횃불 등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을 지칭하는 용어.
내용

1974년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연대(煙臺)는 주로 해안 연안에 위치하므로 산 정상에 입지한 봉수(烽燧)와 다르지만 정치·군사적 기능 면에서는 연변봉수(沿邊烽燧)와 그 성격이 유사하다. 연대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므로, 그 통신 방법은 봉수 즉, 봉대(烽臺)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제주도에 위치한 봉대는 바다를 지나는 적선(賊船)을 멀리서 관망하기 위한 시설이며, 연대는 적선의 내박(來泊)을 가까이서 살피기 위한 시설이었다.

특히, 연대는 유사시에 적과 직접 대치하여 싸워야 하는 요새시설(要塞施設)이었다. 따라서 제주의 경우, 봉대는 소위 ‘오름’이라 부르는 기생화산 정상에 주로 위치하는 반면에 연대는 제주의 해안선을 따라 해안가에 시설되었다.

제주에 봉수나 연대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이며, 그 설치 목적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설치된 봉·연대의 수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는 제주목 9곳, 정의현 5곳, 대정현 4곳 외에 입산(笠山)·지미산(只未山)·판포산(板浦山) 등에 봉화가 설치되었다.

1439년(세종 21) 윤2월에는 제주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 한승순(韓承舜)의 건의에 의하여 22개의 봉수로 정비되었다. 연대는 높이와 너비를 각각 10척으로 축조하도록 정비되었고, 후망인(候望人)에게는 병기 및 기(旗)·각(角)을 지급하고, 적변이 있으면 봉화를 올리고, 운무(雲霧)로 봉화를 변별하기 어려울 때는 각(角)을 불어서 서로 알리도록 조치하였다.

1510년(중종 5) 제주목사 장림(張琳)의 건의에 의해 연대를 둘 수 있는 곳에 후망을 더 가설하였는데, 그 결과 봉수 25곳, 연대 38곳으로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이들은 각기 9개의 진성(鎭城) 및 제주목·대정현·정의현에 소속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25봉수 중에 제주목 소속 봉수에는 별장(別將) 6명, 봉군(烽軍) 24∼36명이 배치되어, 1개월에 5일씩 6개 조(조별인원은 별장 1인, 봉군 4∼6명)로 나누어 순환하며 근무하였다.

연대는 별장 6명, 직군(直軍) 혹은 연군(煙軍) 12명을 배치하였는데, 근무방법은 봉수와 같았다. 봉수나 연대에는 주로 제주에 거주하고 있던 각 관아 소속의 공노비(公奴婢) 가운데서 충당하였다.

연대는 방형·원형·타원형 형태인 석축(石築)으로 축조되었고, 석축 위에 거화(擧火) 및 후망할 수 있는 시설을 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긴요하지 않은 8곳의 연대가 혁파되는 등 19세기에 이르러 연대가 제 기능을 점차 상실해 나갔다.

제주의 38연대 중에서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모두 23개이다. 1973년 4월 3일에 말등포(末等浦) 및 협자(俠子), 1976년 9월 9일에는 천미(川尾)·소마로(所亇路)·조천(朝天)·우지(牛池)·남두(南頭), 1996년 7월 18일에는 수근(修近)·애월(涯月)·두모(頭毛)·서림(西林)·귀덕(歸德)·배령(盃令)·산방(山房)·오소포(吾召浦)·별도(別刀)·연동(淵洞)·당포(唐浦)·대포(大浦)·왜포(倭浦)·함덕(咸德)·좌가(佐可)·종달(終達) 연대 등이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제주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摠錄)』
『서계집록(書啓輯錄)』(박천형, 규장각도서)
『한국군제사-근세조선전기편-』(육군본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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