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권45 석우로전(昔于老傳)에 “7년(253)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사관(使館)에 와 있었는데 우로가 사신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으로 염노(鹽奴)를 삼고 왕비로 취사부를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유촌(柚村)으로 나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염노는 소금을 만드는 데 사역된 노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무렵에 신라는 영역국가로 발돋움하면서도 전쟁포로인 염노로써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제염법은 염분(鹽盆) 등에 바다물을 쪄서 농축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제염법은 많은 재목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매우 고된 일이었다.
따라서 3세기 무렵 신라에 있어서는 전쟁포로 등의 노예계급이나 이에 준하는 처지의 신분층에서 소금 생산을 담당하였고, 생산된 소금은 신라 왕경의 염고(鹽庫) 등에 운반되어 실용에 충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