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영광읍 입석리 원입석마을의 위쪽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가옥 주변으로는 각종 수목과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어 풍치가 좋으며 내부의 원림(園林)도 잘 조성되어 있다. 현재 이 가옥은 안채를 비롯하여 사당 · 사랑채 · 곡간채 · 진광채 · 안측간 · 방앗실채 · 행랑채 · 사랑측간 · 중문간 · 명정(命旌) 현판이 걸려있는 대문간 등 총11동으로 구성된 큰 규모이다.
영월신씨(寧越辛氏) 가문이 영광으로 이주해 온 것은 이곳이 조선초기 보안(保安)과 그의 아들 사구(斯龜)의 처향(妻鄕)이라는 인연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영월신씨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과 응망(應望)을 배출하여 유명해진 가문이다. 사랑채의 상량문으로 보아 1856년(철종 7)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고, 안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당은 신굉규(辛宏珪)의 아들인 휘상(徽常) 대에 현 위치로 이건된 것이며, 또한 1892년(고종 29)에 굉규가 명정(命旌)된 것을 보면 대체로 현재 상태의 건물 규모는 이때에 이룩된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의 좌향은 안채와 사랑채를 남동향으로 하고 기타 건물을 이와 기능적으로 조화되게 배치하였다. 안채는 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ㄱ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이 건물에서 정면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횡각(橫閣)이라고 하는데, 풍수의 비보(裨補)적 의미를 찾기도 한다. 즉 가옥 입지의 형국을 보면 대지를 에워싸는 좌측부분인 청룡이 약하기 때문에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돋아주는 역할을 이 횡각이 한다는 것이다. 횡각의 전면으로는 기단이 넓고 처마의 내민 길이가 좁은데 예전에는 나무 차양을 길게 내어 달았었다고 하며, 현재는 함석을 이용하여 차양을 달아내었다.
사랑채 앞에는 원림을 곱게 꾸몄고, 예전에는 마방(馬房)과 모정(茅亭)이 있었다고 전한다. 사랑채 각방 뒷편에는 골방을 두어 일종의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천장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공루(空樓)라 한다.
건물은 크게 2단으로 된 대지의 윗단에 안채를 중심으로 한 안공간[女性空間]을 설치하였고, 아랫단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사랑공간[男性空間]을 마련하였다. 이 두 공간에의 진입은 솟을삼문(문간채)을 들어섰을 때 안공간은 방앗간채로, 사랑공간은 중문간채를 통하여 진입하도록 그 동선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상류주택 공간구성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석축으로 경계를 두고 한 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하였다. 사당은 안채 뒤쪽 대지의 우측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반가(班家)의 전형적인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