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영조 태실 ( )

목차
관련 정보
청주 영조 태실 정측면
청주 영조 태실 정측면
민속·인류
유적
국가유산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태봉마을 동쪽의 태봉(胎峰)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태를 봉안한 태실.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청주 영조 태실(淸原 英祖 胎室)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지정기관
충청북도
종목
충청북도 시도기념물(1984년 12월 31일 지정)
소재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 6-1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태봉마을 동쪽의 태봉(胎峰)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태를 봉안한 태실.
내용

1984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영조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1694(숙종 20)년 9월 13일에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몸에서 태어나 1등태봉인 이곳에 안태(安胎)되었는데 그가 왕위에 즉위하자 왕실의 예에 따라 1729(영조 5)년에 태실을 개봉축(改封築)하여 석물(石物)로 가봉(加封)하였다.

태실의 형태는 중앙에 2단으로 된 사각의 대석 위에 구형(球形)의 중동석(中童石)과 팔각의 옥개석을 얹어 태실을 만들고 주위에 팔각의 전석(磚石)을 깔고, 각 모서리에는 우주석을, 8면의 중앙에는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얹은 호석난간(護石欄干)을 둘러 가봉하였다.

태실 앞에는 거북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태실비가 남아 있는데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쓴 비명을 새기고 뒷면에는 “옹정 7년 10월 14일 건(雍正七年十月十四日建)”이라 하여 1729년에 태실을 석물로 다시 치장하고 태실비를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이 영조태실에는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1928년에 일제가 관리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창경원으로 옮기면서 크게 훼손되자 그후 태실자리에 민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마을사람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는데 1982년에 석물들이 발견되면서 원위치의 동북쪽 산중턱에 복원하였다.

영조태실의 조성경위와 제반 사항을 소상하게 기록한 『영조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가 남아 있어 태실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조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는 199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