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은 조선 전기 정언각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위치한 애은당 고택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에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루게 된 주택이다. ㅡ자형의 사랑채를 전면에 두고 조금 떨어져 남쪽으로 트인 ㄷ자형의 안채를 뒤쪽에 놓아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동북측 담장 모서리에 사당의 옛터가 있었는데, 최근 복원하였다.
포항(浦項) 오덕리(吾德里) 사우정고택(四友亭古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언각(鄭彦慤, 1498~1556)이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같은 덕동마을에 위치한 애은당(愛隱堂) 고택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이곳을 피난처로 삼았던 정언각의 손자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561625)가 고향인 진주(晉州)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였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 16211688)에게 이 집을 물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강은 이를 셋째 아들 이덕삼(李德三)에게 물려주었고, 그 후 손자인 이헌순(李憲淳)이 자신의 호(號)를 취해 사우당(四友堂)이라 하였다. 약 100년 이후 사랑채를 다시 지어 사우정(四友亭)이라 불렀다. 현대에 들어 안채 동북측 담장 모서리에 있던 옛터에 정면 3칸 규모의 사당(祠堂)을 복원하였다.
사우정고택은 포항 덕동마을의 입구에서 비교적 먼 북쪽 기슭에 남동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은 여연당(與然堂) 고택과는 동쪽으로 연접(連接)해 있으며,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에서는 북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져 있다.
이 고택은 담장과 연결된 대문간채가 없어 길에서 바로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전면에 ㅡ자형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왼편에는 지붕 높이를 낮추어 우사(寓舍)로 사용한 부속 공간 2칸 반이 덧붙여져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우측 네 칸에는 마루와 온돌방이 두 칸씩 있다. 3량가(三樑架)이지만 우측 네 칸 전면에는 샛기둥을 두어 80㎝ 가량의 좁은 툇마루를 두었다. 마루 전면에는 분합문(分閤門)을 달았으며, 온돌방 처마 밑에 사우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의 온돌방 좌측의 한 칸은 공간을 나누어 난방을 할 수 있는 아궁이와 마루를 절반씩 두었다. 그 옆으로는 온돌방 한 칸과 문간이 있다.
문간을 들어서면 ㄷ자형의 안채로 둘러싸인 안마당이 나온다. 안마당의 북쪽 편에 대청 2칸과 안방 1칸이 있으며, 안방 좌측 꺾음부에 2칸 규모의 부엌이 있다. 부엌 아래쪽으로 연결된 부분에는 방과 창고가 1칸씩 있는데, 대청 부분의 지붕보다 높이가 낮다. 건넌방이 없는 것도 특징인데, 그 대신 내고(內庫)가 건넌방 위치에 있었다고 전한다.
사우정고택에서는 경상북도 지역에 위치한 뜰집 중 튼ㅁ자형의 구성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안채의 창이나 기둥을 다듬은 세부 기법들과 함께 전면에 툇마루가 없다는 점이 조선 전기 고택의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집을 조선 전기의 고택과 견주어 보면, 안채와 사랑채의 지붕틀은 3량가로 같지만, 안채 건립 후 약 100여 년이 지나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사랑채에는 샛기둥을 두어 좁은 폭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