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사용했던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였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이 이강을 입향조로 하여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고방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나 후대에 중수되면서 건립 당시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포항(浦項) 오덕리(吾德里) 애은당(愛隱堂) 고택(故宅)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宣祖)대에 정6품의 외직(外職) 문관인 북평사(北評事)를 지내고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561625)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처로 사용하였던 주택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晉州)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 16211688)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포항 덕동마을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집성촌(集姓村)이 되었다.
조선 중기 건립 이후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이나 관련 기록이 없어 그 시기와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현재의 모습에서는 조선 후기의 주택에서 사용되는 기법들을 주로 확인할 수 있다. 1695년(숙종 21)에는 이 집을 이강의 4남인 이덕소(李德邵)가 살림집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애은당’이라는 당호(堂號)는 현재의 소유주인 이동우의 5대조가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애은당 고택은 포항 덕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남동쪽의 용계정(龍溪亭) 방향을 바라보며 배치되어 있다. 담장과 연결된 대문간(大門間)채는 없고, 길에서 바로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으며 우측에서부터 한 칸은 마루,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이다. 사랑채 부분의 지붕을 조금 높이고, 전면 처마 밑으로 비교적 넓은 폭의 마루를 두었다. 사랑채 중앙칸에 ‘애은당’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사랑채와 서쪽으로 연접(連接)하여 안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간(門間)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정면 5칸의 ㅡ자형 맞배지붕 건물이 되었다.
문간을 들어서면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가 있다. 정면에는 중앙 칸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온돌방을 한 칸씩 두었다. 꺾음부에는 두 칸의 부엌을 두었고, 아래쪽으로는 마루를 깔고 판벽을 두른 두 칸의 곳간이 연결되어 있다. 지붕은 양쪽 끝을 모두 맞배지붕으로 구성하였는데, 대청 부분의 지붕이 다른 곳보다 높다.
안채의 동쪽으로는 정면 두 칸 규모의 초가지붕인 고방(庫房)채가 면해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안마당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과 서쪽 마당에 각각 별당(別堂)과 방앗간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