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光山金氏 齋舍 및 祠堂)은 조선 중기에 경상북도 안동시 오천면 외내마을에 지어졌다가 안동댐 건설로 인근의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진 광산김씨의 재사 및 사당이다. 이 사당은 입향조로 알려진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536년(중종 31)에 지어진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를 합향한 것이다. 재사는 2동의 ㅡ자형 건물과 1동의 고사(庫舍)로 구성된다. 이 건물들은 함께 옮겨진 후조당(後彫堂)의 부속 건물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건하기 전의 배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光山金氏 齋舍 및 祠堂)[재사 3동, 사당]은 광산김씨 문중 가운데 예안(禮安)의 입향조(入鄕祖)로 알려진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451534)의 사당과 재사이다. 정면 1칸, 측면 1.5칸의 작은 건물인 사당은 김효로의 사후 2년 뒤인 1536년(중종 31)에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지었는데,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2)를 그곳에 합향(合享)하였다. 2동의 ㅡ자형 건물과 1동의 고사(庫舍)로 이루어진 재사의 초창(初創)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함께 옮겨진 후조당(後彫堂)의 부속 건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부필은 1567년(명종 22) 김효로의 옛 집을 고쳐 후조당을 지었는데, 당대의 기록에 새 사당을 완성하고 신주(神主)를 옮겨 모셨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 사당의 규모와 형식에 대한 기록이 없어 현재의 건물과 동일한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후조당에 딸린 부속 건물로 전해지는 재사의 초창 연대와 변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대략 후조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초반 안동댐 건설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래의 배치와는 크게 달라졌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현재 군자마을로 이름 붙여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위치해 있다. 군자마을에는 탁청정(濯淸亭), 침락정(枕洛亭) 등을 비롯해 원래 광산김씨 예안파(禮安派)의 세거지(世居地)였던 외내마을의 주요 건물들이 다수 남아 있으나, 그것들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원래의 배치가 크게 달라져 이전의 모습들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당과 재사는 높낮이가 다른 대지에 분리되어 있는 현재의 모습 역시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정면 1칸, 측면 1.5칸의 사당은 후조당과 같은 높이에 있는 대지의 서쪽에 좌향을 달리해 있고, 협문(夾門)을 통해 출입한다. 전퇴(前退)를 개방한 부분에 세운 두 개의 팔각형 기둥이 특징적이다.
재사는 후조당과 사당이 위치한 곳보다 낮은 남쪽 대지에 떨어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3량(三樑) 가구(架構)로 구성된 ㅡ자형의 주사(廚舍)가 가장 앞쪽에 있는데, 좌 · 우측 지붕의 형태가, 각각 우진각(隅進閣)과 맞배지붕으로 다르다. 그 뒤로 중앙에 마루 2칸, 양 쪽 끝에 온돌방 1칸씩을 둔 ㅡ자형 맞배지붕 건물이 나란히 있다. 두 건물 사이에 정면 3칸, 측면 2칸, 5량(五樑) 가구의 고사가 동편에 치우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면 주사와의 사이에 안쪽 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두었다. 이 건물 세 동이 전체적으로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건립 당시의 모습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은, 원래의 마을이 댐 공사로 수몰(水沒)되면서 탁청정, 탁청정 종택 등 마을의 주요 건물들과 함께 이건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배치나 좌향과 큰 차이가 생겼지만, 실물 유구(遺構)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조선 중기 이전의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사당의 기둥 머리와 보아지 부분의 초각(草刻)이나 측면의 정자살창(井字살窓) 등은 오래된 기법이라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