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 ( )

주생활
유적
국가유산
조선 중기, 무신 박의장의 후손들이 17세기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하며 건립한 주택.
이칭
약칭
무안박씨 종택
유적/건물
건축 양식
주택
건립 시기
조선 후기
정면 칸수
3칸(사랑채)
측면 칸수
2칸(사랑채)
건물 층수
단층
규모
건물 4동, 토지 1,941㎡(1필지)
소재지
경상북도 영덕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국가민속문화유산(2016년 4월 27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영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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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盈德 務安朴氏 武毅公派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무신 박의장의 후손들이 17세기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하며 건립한 주택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박의장의 넷째아들 도와(陶窩) 박선(朴璿)이 큰형 박유(朴瑜)를 위해 1644년(인조 22)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덕 지역에서 뜰집 유형의 확산이 가장 활발했던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ㅁ자형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도곡 충효당이 있다.

정의
조선 중기, 무신 박의장의 후손들이 17세기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하며 건립한 주택.
건립 경위

무안박씨(務安朴氏)가 영덕에 자리 잡은 것은 15세기 후반으로, 영해면에 모여 거주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6세기 후반에 임진왜란 시 경주성(慶州城)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훈(宣武勳) 일등공신에 훈록(勳錄)된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후손들이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하며 분파하였다. 이 주택은 이전 당시에 박의장의 넷째아들 박선(朴璿, 15961669)이 큰형 박유(朴瑜, 1576~1618)를 위해 지은 종택으로 전해진다. 박선이 1620년(광해군 12)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영덕 도곡동(陶谷洞) 충효당(忠孝堂)이 같은 마을에 있다.

변천

이 주택은 1590년(선조 23)경 반포로 불리던 현 지역에 터를 잡고 약 50여 년간 건축을 진행해 1644년(인조 22)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초창 이후로 크고 작은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원형은 크게 훼손되지 않아 건립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문간채(大門間채)는 1942년에 다시 세운 이후 1978년과 1993년에 보수되었다.

형태와 특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동북쪽의 대소산 정상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곳에 내들이라는 이름의 들판을 남쪽에 두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진입 순서를 기준으로 대문채,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ㅁ자형의 본채, 내삼문(內三門)과 사당(祠堂)으로 구성된다.

대문간채는 정면에서 바라볼 때 좌측으로부터 부엌 2칸, 온돌방 1칸, 대문간 1칸, 온돌방 1칸, 헛간 1칸이 一자형으로 연결된 총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그 외에 헛간 우측으로 규모가 작은 1칸의 화장실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간채는 맞배지붕의 3량 규모로, 대문간은 지붕을 높게 올린 솟을대문 형식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온다. 사랑마당에서 볼 때, 우측으로 남향을 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채(中門間채)와 우익사(右翼舍)를 통해 안채와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배치가 된다. 사랑채는 정면에서 볼 때, 좌측에 1칸의 온돌방, 2칸의 개방된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5량가(五樑架)이며, 측면 2칸이다. 사랑채 전면으로는 약 두 자 정도 마룻바닥을 내밀어 난간(欄干)을 설치하여 누마루처럼 구성하였다.

안채는 좌로부터 2칸의 온돌방, 3칸의 마루, 1칸의 상방으로 구성되어 총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안방의 배면에는 반 칸 규모의 작은 도장방이 있으며, 상방(上房)의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 창문의 중간 설주 흔적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건축기법으로 여겨지는 영쌍창(欞雙窓)이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사랑 대청의 파련대공(波蓮臺工) 등에서도 당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안채의 좌측에는 3칸 규모의 부엌과 그 아래로 1칸의 퇴식칸, 1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된 좌익사(左翼舍)가 정면의 중문간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기단을 낮춰 2칸의 곳간을 두었는데, 바닥면의 높이 차를 이용해 곳간 상부에 안마당 쪽으로 개방된 다락을 설치하고, 상방 전면의 툇마루에서 직접 출입할 수 있는 계단과 통로를 설치하였다. 좌익사와는 달리 안채, 중문간채와 지붕이 분리되어 있으며, 안채와의 사이에 사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을 두었다.

중문간채는 정면에서 볼 때, 좌측으로부터 2칸의 온돌방, 3칸의 문간, 다시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총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본채의 우측 뒤편에는 무의공 박의장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이 있다. 사당 영역은 종택의 좌향보다 약간 동쪽으로 틀어져 독립된 담장 안에 위치해 있으며, 사당채와 내삼문으로 구성된다. 사당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맞배지붕 건물이며, 전면부에 위치한 내삼문을 통해 진입한다. 내삼문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 및 평가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전형적인 ㅁ자형의 뜰집과는 달리 안채와 면한 안마당의 폭이 5칸으로 매우 넓은 편인데, 이는 영덕군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뜰집인 창수면 인량리의 영덕 충효당 종택과 유사한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적 유사성은 영덕 지역의 뜰집 확산 과정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 평가되기도 한다. 17세기 중반에 건립된 이후 큰 훼손 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는 만큼, 전체적인 배치나 구성 외에도 창호나 목구조의 세부 기법 등에서 당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93년도 문화재수리보고서』(문화재청, 1995)
『명가의 고문서 7, 절의를 숭상하고 충정에 뜻을 두다: 무안박씨 무의공후손가』(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논문

김화봉, 「영덕지역 뜰집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연합논문집』 20-2, 대한건축학회지회연합회, 2018)

인터넷 자료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배창현(울산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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