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계서당 종택(奉化 溪西堂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이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 경영하던 초당을 후손들이 중건한 종택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성이성이 지은 방 1칸 규모의 계서초당(溪西草堂)을 후손들이 증축하여 기와집으로 바꾸었고, 이후 건물을 하나씩 지어 종택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ㅁ자형의 주택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 등 주요 건물들의 건립 연대가 다르고 증축 · 개축의 흔적이 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ㅁ자형 뜰집의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봉화 계서당 종택(奉化 溪西堂 宗宅)은 청백리(淸白吏)로 추앙되던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 1613년(광해군 5)에 계서초당(溪西草堂)을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창녕 사람이었던 성이성은 부친이었던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15611629)가 임진왜란 때 처가가 있는 영주 이산면으로 가족을 피신시키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이성이 건립한 것으로 전하는 계서초당이 중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정조대에 성이성의 후손인 성갑하(成甲夏, 1622~?)가 처가였던 닭실마을 예천권씨(醴泉權氏)의 재산으로 방 1칸이던 초당에 툇마루와 방 하나를 덧붙여 증축하면서 기와집이 되었다. 이후 건물을 하나씩 지어가면서 종택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여러 건물들 중 사랑채의 건립 연도가 가장 후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성이성의 호(號)를 따라 현재 종가 전체를 통칭하는 계서당(溪西堂)이라는 당호(堂號)가 붙었다. 안채의 목조 가구에서 증축 · 개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봉화 계서당 종택이 위치한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이다. 물야면은 영주시 부석면과의 경계에 있고, 부석사(浮石寺)가 자리 잡고 있는 해발 800미터 가량의 봉황산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7㎞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다. 가평리의 북동쪽으로는 해발 1,200m 가량의 문수산이 있지만, 종택이 위치한 곳은 양쪽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모여 내성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이다. 종택은 내성천을 서편에 두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문간채(大門間채), 사랑채, 행랑채(行廊채), 안채,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문간채를 지나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중문간채(中門間채)가 있다. 중문간채를 들어서면 안마당을 두고 정면에 안채가 있고, 양 측면에 행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봉화 계서당 종택의 전체적인 구성은 경상북도 지역의 보편적인 뜰집 구성과 유사하지만, 안채와 사랑채의 세부 구성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가(五樑架)이다. 중앙의 3칸은 대청이며 좌우 2칸은 온돌방이 대칭으로 있다.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방의 갯수가 많은 편인데, 대청 서쪽 전면의 안방을 제외한 세 개의 방은 주로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규방(閨房)과 같은 의미의 ‘도장방’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 주택에서 도장방이라 불리는 방은 총 4개인데, 나머지 하나는 중문간채의 가장 서쪽 편에 있다. 부엌은 안채 양쪽 온돌방 전면에 각각 1개씩, 총 2개가 있는데, 대청 동쪽 온돌방 아래에 위치한 부엌은 마당 쪽으로 길게 뻗어 중문간채와 만나며, 대청 서쪽 온돌방 앞의 부엌은 사랑채 부분과 1m 정도 틈을 두고 위치해 있다. 부엌의 상부에는 모두 다락을 두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5칸의 5량가 팔작지붕으로 후대에 증 ·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통의 뜰집과는 다르게 보 방향으로 두 칸 반으로 구성한 겹집이고, 이로 인해 전면과 측면 일부가 ㅁ자형의 배치에서 외부 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돌출된 면에는 ㄴ자형으로 툇마루를 두었는데, 툇기둥 바깥쪽으로 마루를 40㎝ 가량 더 내밀어 난간(欄干)을 둘렀다. 양쪽 측면은 널판으로 벽을 만들어 각 칸에 문을 달았고, 마루 뒤편으로는 사랑방 · 책방 · 사랑윗방으로 사용된 온돌방 4개를 두었다. 사랑채의 온돌방의 뒤쪽으로는 주인이 바깥에 나가지 않고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판자로 3면을 막고 바닥을 뚫은 독특한 공간을 두었는데, 아래에 항아리를 놓아 간이 화장실로 썼다고 전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3량 맞배지붕인 사당은 ㅁ자형의 몸채 동북쪽에 있다. 남쪽의 출입문을 제외한 삼 면에 흙을 돋워 얕은 높이의 둔덕을 두었다. 이러한 모습은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사당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묘소 조성 시 흙 둔덕을 이용해 활개를 두는 것과 유사하다.
봉화 계서당 종택은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ㅁ자형 뜰집의 한 유형에 속하나 전형적인 뜰집의 구성과는 조금 다른 안채와 사랑채의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비교적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고, 다른 시기에 순차적으로 지어져 그 차이점을 관찰할 수 있다. 성의성은 13세에서 18세가 되던 해까지 부친인 성안의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고, 이후 성이성이 실제로 네 차례 어사(御史)가 되었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춘향전의 실제 모델이라고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