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집에 걸려 있는 「쌍벽당중수기」에 의하면 가정병인(嘉靖丙寅, 1566년)에 안채가 지어졌다고 하는데 가전(家傳)하는 바로는 입향시조인 김균(金筠)이 풍산(豐山)의 구담(九潭)으로부터 이주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 뒤 1864년(고종 1)에 남익삼간(南翼三間)을 고쳤으며, 1892년(고종 29)에도 대대적인 중수를 가하고 외당인 별당채를 따로 지었다고 한다.
높지 않은 뒷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10여 호의 집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이 집은 제일 깊은 자리 바로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다. 남향한 양지바른 터전에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어서 솟을대문 있는 행랑채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고 차츰 높아가다가 안채의 정침(正寢: 몸채)은 월등히 높게 지어져 있다.
봉화 · 영주 · 안동 지방의 □자나 {{#029}}형의 날개집에서 볼 수 있는 경사진 터전을 이용하는 살림집의 예에 속하는데, 정침이 유난히 과장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솟을대문이 있는 바깥행랑채는 단간통(單間通)의 7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에 달린 사랑방이 마주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인데 남익삼간(南翼三間)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집은 중문채보다는 월등히 높게 지었고 지붕도 팔작기와지붕으로 독립시켰다.
외당인 쌍벽당이 건축되기 이전까지는 여기가 남자들의 거처였다. 중문채와 사랑채가 맞닿은 부분에 중문이 있는데 들어서면 담벼락이 막아선다. 이것은 내외벽으로 연통되어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면 왼쪽으로 비껴서서 다음 칸 터진 곳을 통해서 안마당에 들어선다.
안마당 북쪽 끝에 정침이 남향하였고 마당의 좌우로는 동서 변의 날개가 있어 마당을 감싸고 있다. 정침의 중심부는 육간대청(六間大廳: 넓은 면적의 대청을 일컫는 표현도 됨)이다. 기둥 간살이는 열려 있어 분합문의 설치 등이 없다.
단지 뒷벽에만은 머름을 드리고 바라지창을 달아서 겨울철 북풍한설을 막아내도록 의도하였다. 대청의 좌우로는 안방과 건넌방이 있다.
안방 쪽은 방 남쪽에 부엌이 있고 건넌방 남쪽 칸에도 함실아궁이의 시설이 있으나 이 한 칸은 별당으로 통하는 협문으로 열렸다. 협문의 남쪽으로는 사랑채에 달린 골방이 있다. 정침에서의 특징은 육간대청을 구조하였다는 점이다.
별당인 쌍벽당은 안채의 동쪽, 사랑채보다 뒤로 물러선 자리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8칸 넓이인데 그 중의 2칸만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깐 대청이다.
대청의 뒤쪽 벽과 동쪽 측벽에는 머름을 드리고 문얼굴을 세워 바라지창을 달았고, 문벽선과 기둥 사이에는 판벽을 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기와를 이은 팔작지붕이다. 별당 뒤로는 사당채가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