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은 기묘사화 때 안동 풍산현으로 낙향한 예안이씨 7세손 이영이 1525년(중종 20)경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주택이다. 이영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필간(李弼幹)의 첫째 아들로, 1507년(중종 2)에 생원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좌우 익사로 연결되어 완전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나, 정면에서 볼 때, 우측으로 1.5칸 정도가 돌출되어 있다. 가운데 설주가 있는 영쌍창과 같이 건립 당시 모습으로 추정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 집은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禮安李氏 司直公派 舊宅)은 예안이씨 7대손이자, 사직공(司直公) 이필간(李弼幹, ?1514)의 아들 중 첫째인 이영(李英, 1482?)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서 낙향하여 1525년(중종 20)경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의 낙향을 계기로 안동군 풍산읍 일대에 예안이씨의 세거지(世居地)가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이필간의 둘째 이전(李荃, 14861529)의 아들 이홍인(李洪仁, 15281594)이 1551년(명종 6)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忠孝堂)이 같은 마을에 있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은 1525년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가옥이다. 1925년 현 소유자 이용흠의 부친이 매입하여 사랑채를 수리하였다는 1986년의 조사 기록이 있다.
이 주택은 안동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0㎞가량 떨어진 풍산읍의 남쪽 하리 1리에 위치한 야산을 등지고 남동쪽을 향해 있다. ㅁ자형의 배치는, 북쪽으로 약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예안이씨 충효당과 유사하지만, 전면에서 볼 때, 우측면으로 조금 돌출된 부분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ㅁ자형의 몸채 전면 중앙에는 안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중문간(中門間)을 두었고, 우측에는 온돌방 2칸과 마루 1칸으로 구성된 사랑 영역이 있는데, 이 중 온돌방 1칸과 마루 1칸이 ㅁ자형의 배치에서 전면 우측으로 돌출된 부분이다.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는 기둥 간격이 조금씩 다르며, 전면의 처마 밑에는 폭이 좁은 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중문 좌측으로는 마굿간과 모방을 각각 한 칸씩 두었다.
중문을 통해 들어가면 전면에 2칸의 대청마루가 있으며, 안마당의 폭도 이와 같다. 전면에서 대청마루를 바라볼 때, 좌우측에 각각 상방(上房)과 안방이 1칸씩 있다. 안방에서 사랑 영역으로 연결된 우측의 익사(翼舍)에는 부엌과 고방(庫房)이 있고, 상방에서 모방으로 연결된 좌측의 익사에는 우익사(右翼舍)보다 작은 규모의 부엌과, 마루를 깐 고방,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를 차례로 두었다. ㅁ자형으로 된 몸채의 모든 부분이 3량가(三樑架)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으로 약 18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안동 하리동 삼층석탑’이 있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은 경상북도의 ㅁ자형 뜰의집 유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건립 연대가 비슷한 인근의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과는 달리 이 집은 안마당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으며, 두 집은 대청마루 상부의 지붕 구조, 꺾음부의 공간 구성 방식에 있어서도 차이점이 있다. 창틀 가운데에 설주를 세우는 영쌍창(欞雙窓)의 흔적은 조선 중기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청 전면 기둥의 민흘림 기법이 특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