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종 때의 청백리 김양진(金楊震)의 12대손인 김중휴(金重休)가 분가할 때 건립한 주택이다. 뒷날 김중휴가 조산대부(朝散大夫)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지냈기 때문에 이 집을 참봉댁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네 어귀를 돌아들면 약간 경사진 높은 터에 토담을 두르고 행랑채에 솟을대문을 내었다. 원래는 5칸이었으나 대문의 오른쪽 2칸은 허물어져 철거되고 주초만 남아 있다.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남향하여 배치되었고, 그 오른쪽에 곳간이 병렬되어 있다.
마당의 동편에는 사랑채가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초당 · 마구간 등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다.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간의 왼쪽에는 툇마루 뒤로 1칸 반 크기의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왼쪽 끝에 익사(翼舍) 1칸을 돌출시켜 사랑마루를 꾸몄는데, 뒷벽 지게문 위에 벽감을 설치하여 처마 밑에 달아놓았다.
중문간의 오른쪽에는 마구간과 부엌방이 1칸씩 놓여서 앞채를 이루었으며 안방부엌과 직각으로 접하였다. 안채는 안마당과 같은 너비의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배치하였다. 안대청의 뒷벽에는 각 칸에 양여닫이 널문을 내었는데 어간(御間)의 것은 문턱을 낮추어서 뒤꼍 출입이 용이하게 하였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판벽을 친 4칸 곳간채를 병렬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전면의 툇마루 뒤에 2칸 규모의 온돌방과 앞이 개방된 마루 1칸을 배치한 ㄱ자집인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관계로 방구들과 마룻바닥이 다 파손되었다. 기둥과 보등이 오래된 목재이면서도 풍화의 정도가 안채보다 덜한 것으로 보아 안채보다 늦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행랑채의 5칸 중 대문간의 오른쪽 2칸은 주춧돌만 남아 있고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안채 대청의 앞쪽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보간[樑間]이 1칸으로 비교적 좁은 우물마루 상부는 3량가(三樑架)로 동자주를 세워 마룻대를 받고 있다.
이 집은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안동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주택이다. 일반적으로 ㅁ자집에서는 후대에 사랑채 부분을 확장, 개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사랑채를 별동으로 증축한 예에 속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