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오충좌(吳忠佐)가 개성윤(開城尹)을 역임하고 있을 때 우왕(禑王)이 기녀(妓女)를 거느리고 귀법사(歸法寺)의 내(川)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오충좌의 집에 들른 일이 있었다. 오충좌의 아내는 본래 단양대군(丹陽大君) 왕후(王珛)의 가비(家婢)로 의순고(義順庫)에 몰입(沒入)되었던 여인이었는데 슬하에 딸 셋을 두고 있었다. 오충좌가 천역(賤役)을 면제시키고자 하여 내시를 사사(私事)하고 그 가운데 딸을 바쳐 우왕의 비로 삼게 하였다. 이때부터 우왕이 자주 그 집에 들렀다.
1387년(우왕 13)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며, 창왕(昌王) 즉위년에 의비(毅妃)·숙비(淑妃)·안비(安妃)·정비(正妃)·선비(善妃)·덕비(德妃) 등 여섯 왕비와 영선옹주(寧善翁主)·화혜옹주(和惠翁主) 등 두 옹주가 사저(私邸)로 보내지고 오충좌도 원지(遠地)에 유배되었으나 왕의 생일을 맞아 방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