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0년(공양왕 2) 5월 우사의(右司議)로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 유구(柳玽)와 함께 이색(李穡) 등을 청주에서 국문하였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역임하였다. 1392년에 왕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이성계(李成桂)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의원을 보내고 약을 주니, 강독관(講讀官)으로서 말하기를 “제군사(諸軍事: 이성계)는 나라의 장성(長城)이니 말달리고 사냥하다가 만약에 상잔(傷殘)함이 있으면 나라의 복(福)이 아니외다.”라고 하니 왕이 책을 덮고 답하지 아니하였다.
1392년 4월 간관으로서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趙浚), 전정당문학(前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논핵하였다.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파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양광도로 유배 후 장살(杖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