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옹기 제작 기능 혹은 그러한 기능을 보유한 장인.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한편 중앙 관청과 왕실에서 사용한 옹기들은 경공장에서 제작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104명의 옹기장과 각 옹기장 밑에 보조공 2명씩을 두어 총 312명이 예속되어 있었다. 관청에 소속된 옹기장들은 각 부서별로 배치되었는데 공조(工曺) 13명, 봉상시(奉尙寺) 10명, 상의원(尙衣院) 10명, 내자시(內資寺) 8명, 내섬시(內贍寺) 8명, 사도시(司導寺) 8명, 예빈시(禮賓寺) 8명, 내수사(內需司) 7명, 소격서(昭格署) 4명, 사온서(司醞署) 4명, 의영고(義盈庫) 4명, 장원서(掌苑署) 8명, 사포서(司圃署) 10명, 양현고(養賢庫) 2명의 옹기장을 두었다. 옹기장의 인원으로 볼 때 옹기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 소속된 외공장은 지방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작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는 경상도 초계군(草溪郡)과 진주목(晉州牧) 세 군데 ‘황옹(黃瓮)’을 굽는 가마를 언급한 기록이 있고, 『경국대전』 공전(工典) 외장조(外匠條)에는 충청도 임주(林州, 林川)에 황옹장(黃瓮匠) 한 명이 있다고 하였다. 기록에는 지방 옹기장을 일일이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옹기를 제작하던 도기소가 전국 185곳에 이른다는 『세종실록』을 통해 옹기장의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옹기장들은 흙이나 땔감과 같은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고, 주로 도자기를 굽는 사기장과 함께 협업을 통해 마을을 형성하여 생산의 효율을 높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세종실록(世宗實錄)』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 『우리나라 옹기』(송재선, 동문선, 2004)
- 「옹기장과 제조 기술에 대한 고찰(상)」(정명호, 『역사와 실학』 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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