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악은 고려시대 우리나라 음악인 향악(鄕樂)을 의미하였고, 그 많은 중국계 속악(俗樂)인 당악(唐樂)을 가리키는 좌방악(左坊樂)이라는 말의 대칭어로 사용되었다. 우방과 좌방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초에 이미 쓰였음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서 확인되며, 우방악과 좌방악을 몰아서 양부악(兩部樂)이라고 불렀음이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우방악은 향악 이외의 당악을 포함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세종 때 새로 정비된 아악이 고려 때 당악이 차지하였던 좌방의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1457년(세조 3) 우방악은 장악서(掌樂署)의 악공(樂工) 300명에 의해서 연주되었으며, 1485년(성종 16) 장악원의 우방 소속 악사(樂師) 2명과 악공 518명(보교(補敎) 52명 제외)으로 연주되었다.
우방악을 연주하였던 악공들은 조선 후기 우방 차비(差備)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1746년(영조 22) 악사 5명과 악공 441명이 장악원의 우방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 때의 우방악은 궁중잔치에서 연주하는 향악을 연주곡목으로 삼았으나, 조선시대의 우방악은 여러 궁중의식에 쓰인 향악과 당악의 연주곡목들이었다.
장악원의 우방악은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조회하는 조의(朝儀), 정기적으로 백관을 알현하는 조참(朝參), 생원과 진사의 급제를 축하하는 방방(放榜), 임금이 가마를 타고 행차할 때 따르는 전부고취(前部鼓吹)와 후부고취, 단오와 추석 때 행차하는 행행(行幸), 궁중의 잔치인 진연(進宴) 등의 궁중의식에서 연주된 당악과 향악을 포함하였다. 우방악의 전통은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