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상으로 나타난 문묘의 위안제는 1682년(숙종 8) 7월 14일에 심한 폭풍우로 전내(殿內)에 있는 은행나무가 부러지고 동무(東廡)ㆍ서무(西廡)와 신문(神門)의 기와가 모두 파손되었을 때 이를 조속히 개수하고 위안제를 올릴 것을 건의한 성균관의 보첩(報牒)을 받고 왕명에 의하여 지낸 예가 있다.
이 때부터 모든 위안제는 이를 예로 삼아 실시하였다. 1755년(영조 31) 7월, 역시 전내에 있는 큰 잣나무가 뽑히었는데, 위안제를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때 마침 유생들이 권당(捲堂)을 하여 집사(執事)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임시로 사학(四學)의 기재생(寄齋生)들로 하여금 제사를 거행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