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전기 화주방어낭중을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화주방어낭중
관련 사건
거란의 침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전기 화주방어낭중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현종 때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郎中)으로 있으면서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 하공진(河拱辰)이 동여진(東女眞)을 치다 패배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마침 여진족 95명이 내조하여 화주관(和州館)에 이르자 이들을 모두 죽였다.

여진족이 이 사실을 거란(契丹)에 호소하여 거란황제가 군신들에게 “고려 강조(康兆)는 왕을 죽인 대역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1010년(현종 1) 5월 하공진과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11월에 거란이 서경에 침입하자 하공진과 함께 소환되어 그 관작(官爵)이 복원되었다. 1011년 거란이 쳐내려오자 강감찬(姜邯贊)이 왕에게 남행(南行)을 청하여 채충순(蔡忠順) 등이 호위하여 광주(廣州)로 갔다.

이 때 “하공진이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고 따르던 신하들이 두려워 다 도망갔으나 채충순·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 등과 함께 도망하지 않고 왕을 호종하였다.

광주에 이르렀을 때 “신의 고향인 양성(陽城)이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청하건대 행차하소서.”하니 왕이 기뼈하여 양성으로 행차하였다.

그날 밤 김응인(金應仁) 등과 함께 어명을 사칭하고 왕의 안장을 뜯어내어 고을 사람들에게 주니 새벽에 현리(縣吏)가 다 도망하였다. 김응인 등과 왕을 호종하다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필요한 물건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달아났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