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유장(幼章), 호는 소남(邵南). 명장 윤관(尹瓘)의 24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통덕랑 윤성수(尹聖壽)이다. 아버지는 생원 윤취망(尹就望)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이성(李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을 외워 읽되 한 글자라도 그릇됨이 없었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이씨(李氏)의 교육을 받았다. 17세에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 뒤 과거공부를 버리고 오직 도학에만 열중하였으며,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겨가 이익의 거처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지조가 굳고 견해가 분명하며 성실한 성품을 지녀 이익이 항시 말하기를 “나의 도(道)가 부탁할 곳이 있다.” 하였고, “성학(聖學)의 공부는 사서(四書)에 지날 것이 없으니, 체험의 공부를 한시라도 가벼이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익의 가르침은 거의 평생을 두고 그 뜻을 이어받았다. 한편, 안정복(安鼎福)·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 등과 친교를 맺으며, 오로지 독서와 진리탐구에 몰두하였다. 역법·상위(象緯)·천문·지리·의약 등 실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학문의 수립을 역설하였고, 이기설(理氣說) 등 성리학에도 능통하였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소학』을 토대로 삼고 수백번을 읽고 외우도록 가르쳤다. 스승을 위하여 「성호선생행장」을 썼으며, 이익의 시문집이 전해온다.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우리나라의 역사에 어두움을 탄식하여 고대사의 위치를 밝히는 자수(紫水)·패수(浿水)·열수(洌水)·대수(帶水)의 『사수변(四水辨)』을 저술하였고, 문집으로는 『소남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