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현통(玄通), 호는 징암(懲庵). 도승지 윤담무(尹覃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윤지경(尹知敬)이다. 아버지는 참판 윤집(尹鏶)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김신국(金藎國)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고, 봉교·지평·부교리·부수찬·이조좌랑 등을 거쳤다. 1664년에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정언 정창도(丁昌燾) 등과 창원현감의 파직을 청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제주시재어사(濟州試才御史)가 되어 제주도의 문·무사(文武士)를 시험하였다.
또한, 제주의 해변 형세를 자세히 살펴 방비를 철저히 할 것과 먼 곳을 살필 수 있게 누대가 있는 배의 건조를 주장하였다. 1672년(현종 13) 헌납으로 있을 때, 사복시정(司僕寺正) 박지(朴贄)가 사대부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바가 많으니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1673년 집의가 되고, 다음 해 뱃길에 밝다 하여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의 청으로 뱃길을 살폈다. 1674년(숙종 즉위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677년 과거시험의 시관으로서 시험 문제를 잘못 출제해 연안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이조판서 오시수(吳始壽)의 천거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강화유수로서 진무사(鎭撫使)를 겸하였다.
1679년 개성유수가 되었고, 치수 사업에 힘썼다. 또한,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과 함께 송시열의 죄과를 규찰할 것을 청하였다. 1680년 파직되었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추방당하자 다시 기용되어 공조판서를 지냈고,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예서에 뛰어났으며, 부평의 「행풍덕군수 권신중갈(行豐德郡守權信中碣)」·장단의 「호조판서 이명비(戶曹判書李溟碑)」·양주의 「지돈녕 정효준비(知敦寧鄭孝俊碑)」·청주의 「보살사중수비(菩薩寺重修碑)」·춘천의 「청풍부원군 김우명비(淸風府院君金佑明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