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이광좌(李光佐)의 추천으로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경종이 죽은 뒤 행장찬집청 낭청이 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 부수찬, 사간원헌납을 거쳐 1728년 형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731년 성천부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사간 한덕후(韓德厚)로부터 역적의 친척이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지평 김상중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1733년 당상관에 올라 승지가 되고, 대사간, 경연참찬관 등을 거쳐 1737년 강화유수로 나갔다. 다음 해부터 대사헌 · 대사간 · 병조참판 · 호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제언사 당상을 겸직했을 때는 궁가(宮家)의 제언(堤堰)의 절수(絶水) 폐단을 논하였다.
1739년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다음 해 도승지 · 예조참판을 거쳐 1741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함경도관찰사로 전보되었다. 이 때 함경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자, 조정에 주청해 삼남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에 최선을 다하였다. 1744년(영조 20) 대사헌이 되고 다음 해 함경도심리사가 되어 삼수(三水) 갑산(甲山) 서수라(西水羅) 및 백두산 등지를 순찰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면서 토문강(土門江) 일대가 황무지이므로 잃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또 북병사가 경성판관을 겸하게 할 것과 함경도의 인물을 발탁해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745년에 특명으로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아버지 윤지인과 함께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다 한다.
참고문헌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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