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파 옥현리 유적 ( )

고대사
유적
황해북도 은파군 옥현리에 있는 낙랑군 시기의 덧널무덤.
유적
건립 시기
낙랑군 시기
관련 국가
낙랑군
소재지
황해북도 은파군 옥현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은파옥현리유적은 황해북도 은파군 옥현리에 있는 낙랑군 시기의 덧널무덤이다. 사리원역사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덧널무덤 북벽의 동쪽과 서쪽 귀퉁이에서 각각 항아리와 화분형 단지 1개씩과 서벽면의 중간에서 칼 · 창 · 끌 · 도끼 등 다수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매장 주체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껴묻거리의 구성과 배치 상태로 보아 낙랑군 시기의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정의
황해북도 은파군 옥현리에 있는 낙랑군 시기의 덧널무덤.
발굴경위 및 결과

사리원역사박물관은 1976년 황해북도 은파군 옥현리 사탄마을 일대를 지표 조사한 후 낙랑군 시기 덧널무덤 1기를 발굴하였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고분군의 소재가 알려져 있었는데, 고분군 이외에도 주거지, 고인돌, 돌널무덤 등 많은 선사유적과 고구려 돌방무덤 등의 분포가 확인되었다.

형태와 특징

제1호 무덤의 봉토 상태는 분명하지 않지만, 위에서부터 120㎝ 가량 내려가 남북 길이 300㎝, 동서 길이 200㎝의 구덩이가 드러났다. 여기에서 다시 100㎝를 더 내려간 곳에서 구덩이의 바닥이 나타났다. 구덩이 북벽의 동쪽과 서쪽 귀퉁이에 각각 항아리와 화분형 단지 1개씩이 짝을 이루고 있었다. 서벽면의 중간에 거의 붙어서 칼 · 창 · 끌 · 도끼 등 철기류가 놓여 있었다.

칼은 남은 길이가 82.5㎝로서 칼끝은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자루와 칼집은 부식된 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칼몸과 자루의 사이에는 청동으로 만든 검코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창의 날 부분은 단면이 타원형이고 자루를 끼우는 부분은 둥근 통모양으로 생겼다. 길이는 30.3㎝이다.

끌은 자루를 끼우는 쪽이 둥근 통 모양이고 날쪽의 단면은 장방형이며 길이는 24㎝이다. 도끼는 크고 작은 2점이 출토되었는데, 자루주머니 부분은 좁고 두꺼우며 날쪽으로 갈수록 차츰 얇아지면서 약간 넓어졌다. 큰도끼는 14.2㎝, 작은도끼는 8.7㎝이다.

토기류 중 항아리 2점은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것들로 둥근 몸통에 비교적 높은 아가리가 달렸으며 굽은 달리지 않았다. 아가리를 제외한 전면에 꼰무늬가 나타나 있는데, 1점은 회색이고 다른 1점은 갈색을 띠고 있다. 높이는 각각 31.7㎝, 34㎝이고, 입 지름은 25.8㎝, 25.4㎝이다.

화분형 단지는 2점 모두 갈색이며 바탕흙에는 모래가 많이 섞였는데 물레는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각각 12.5㎝, 17.7㎝이고, 입 지름은 11.5㎝, 17.5㎝이다. 항아리와 화분형토기는 낙랑고분에서 출토되는 전형적인 토기이다.

의의 및 평가

은파옥현리유적의 매장 주체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껴묻거리의 구성과 배치 상태로 보아 낙랑군 시기의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논문

박승률, 「은파군 옥현리 1호무덤」(『고고학자료집』 6,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