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김성일(金誠一)의 재사로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재사 서쪽 약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김성일 신도비의 건립연도가 1634년(인조 12)으로 기록되어 있어 재사는 이보다 늦은 170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일의 묘소가 있는 산 아래의 동쪽 기슭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앞으로는 밭이 넓게 전개되어 있으며, 약 200m 전방에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통하는 국도가 보인다.
건물의 정면은 누다락집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는 뒤쪽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높은 터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마루의 바닥높이가 누마루 바닥보다 높다. ㅁ자형 재사의 5칸의 누다락 정면은 누하(樓下)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어간(御間)에 대문을 내었을 뿐, 양옆의 앞쪽은 흙벽으로 막았다.
안마당 쪽을 개방하여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누하어간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 변이 3칸인 방형 중정에 이르는데, 정면에는 3칸의 대청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왼쪽의 마당 쪽으로 나앉은 안방은 윗머리의 뒷방을 통하여야 대청으로 직접 출입할 수 있어 동선처리가 석연하지 못한 감이 든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2칸통으로 된 윗방과 마루방 1칸, 사랑방 2칸이 차례로 배열되어 앞채의 누마루 측면과 직교하였다.
안대청에서 누마루까지는 난간을 세운 쪽마루로 연결하였다. 앞채의 누마루는 누하에 두리기둥을 두고 누상에는 각주를 세웠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 가구(架構)는 3량가(三樑架)로 사다리꼴 판대공을 사용하였고, 보 밑에 깔아놓은 보아지는 수평으로 길게 뻗어 나와 무력한 감을 준다.
누마루의 정면과 왼쪽 측면 벽은 판벽이며 매 칸의 중앙에 두짝여닫이 널문을 내었고 안마당 쪽은 개방하여 헌함을 설치하였다. 안채는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각주를 세운 위에 3량가로 구성되었고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올려놓았다.
안대청의 뒷벽에도 각 칸의 중앙에 두짝열개 널문을 달았다. 전면에 누다락이 있는 ㅁ자형 평면으로 된 재사의 일반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경사지를 이용하여 안채 대청바닥을 누마루보다 더 높게 설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간살이나 창호에 부분적인 변형이 다소 가하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재사건축의 실례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