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의성김씨 23대손인 김후(金煦)의 주택으로 그의 장인 권관풍당(權觀風堂)이 1630년경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김후는 자를 춘향(春鄕), 호를 도암(陶庵)이라 하였으며, 김용(金涌)의 손자이다. 이곳의 옛 지명이 율리였던 관계로 의성김씨율리종택이라하기도 한다.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밭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는데, 축대를 높이 쌓아올려서 집 전체가 솟아 보인다.
집의 앞쪽은 넓게 시야가 트여 있으며, 전면 왼쪽 약 200m 거리에 풍산으로 가는 국도가 동남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있다. 가옥의 형태는 ㄇ형의 안채부분과 一자형의 사랑 및 대문간 · 외양간 등으로 구성된 앞채가 결합되어 {{#029}}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 6칸 중 대문간에서 왼쪽으로 3칸이 사랑부분인데, 사랑방 2칸에 이어 끝 부분에 마루방 1칸이 돌출하여 왼쪽 날개를 이루었다. 사랑부분의 앞쪽 3칸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낮은 난간을 둘렀다.
마루방의 북쪽 벽 상부에는 처마 밑에 달아맨 벽감(壁龕)이 설치되어 있는데, 널문이 반닫이 장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설치되었다. 대문간의 오른쪽에는 외양간을 1칸 놓았고 그 오른쪽 끝에 온돌방을 1칸 돌출시켜 오른쪽 날개를 이루었다.
안채의 중앙부는 정면 2칸 크기의 대청이 안마당 가득히 차지하였다. 대청의 왼쪽에는 윗머리부터 도장방과 사랑방이 1칸씩 놓여 있다.
마당 쪽으로 연달아서 부엌과 책방이 배치되어 앞채의 사랑방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2칸통의 안방이 접하였고 그 앞에 2칸 길이의 부엌이 배치되어 앞채에 닿았다. 앞채는 높은 축대를 쌓고 자연석 주초(柱礎)를 놓아 방주(方柱)를 세웠다.
이 앞채는 퇴락하여 1934년에 해체,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안채에 비해서 재목도 빈약하고 개구부도 커졌다. 안채의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상부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인데 방주 위에 보아지 등이 없이 들보를 사괘맞춤으로 얹어놓았다.
종보 위에는 각대공을 세우는 등 간소한 결구를 보이고 있으나 재목은 비교적 후하게 사용하였다. 대청 뒷벽은 중방 하부에 판벽을 꾸미고 각 칸에 쌍여닫이 널문을 내었는데, 문틀의 아래 · 윗면에는 중간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이 남아 있다.
사랑채 부분은 중건(重建)으로 인하여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이나, 안채 부분은 후한 재목과 간소한 결구로 소박한 품위를 지니고 있다.
평면구성 및 중간설주의 유구(遺構) 등을 통하여 볼 때 조선중기 주택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