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고 하여, 학봉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1762년 이 곳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종택을 신축하여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 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은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였다.
야산을 배산하고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서남향으로 좌정하였는데,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동북쪽으로 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측에 정침(正寢 : 주택의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과 사당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마당 건너편에는 역시 근년에 지은 운장각(雲章閣)과 정자가 각각 서북향으로 앉아 있다.
정침은 ㅁ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에 아랫채를 달아내어 합해서 보면 ‘日’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정침의 정면 우측에 사랑채가 돌출형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건물은 원래 있던 소계서당을 개조한 것이다.
소계서당의 평면은 2칸통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길게 반 칸 폭의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었으나 사랑채로 개조하면서 좌측 2칸을 사랑방으로 꾸미고 우측의 2칸은 사랑마루방으로 만들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2칸통의 작은 사랑방을 두었으며, 뒤로는 1칸짜리 책방을 놓아 안채와 접하게 하였다.
안채는 우측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좌측에는 2칸 안방을 두고 이어서 부엌을 연결하였다. 사랑채나 안채의 가구는 모두 5량가구에 제형 판대공을 세웠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을 배치하고 주위에 토석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로서 구조 양식적으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지만 학봉의 종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