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자는 인지(引之)이다. 이진(李珍)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유(李猷)이다. 아버지는 이의인(李依仁)이며, 어머니는 송구빈(宋九贇)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정언, 이듬 해에는 철산군수·철원부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병조좌랑, 1457년 예조정랑을 거쳐 1459년에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이듬 해에는 함길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여러 장수들을 위문하였다.
1461년 북방의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해 한명회(韓明澮)를 순찰사로 삼고 그 종사관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병을 이유로 꺼리자, 웅천진(熊川鎭) 군졸로 복무하는 형벌을 받았다가 곧 사면되었다. 이듬 해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가 기근에 시달리는 도민을 적절히 진휼한 공로를 인정받아 1466년 형조참판·예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 함경도관찰사로 나아가 이시애(李施愛)의 난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했다. 1470년(성종 1)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향교를 적극 후원해 이 지방의 학문을 진작하는 업적을 쌓았다. 1474년 형조판서로 재임하던 중 주문사(奏聞使) 김질(金礩)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토지 30결, 노비 3구, 말 1필이 하사되었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경기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혼인과 빈객 접대에 필요한 어육을 황해도관찰사 이봉(李封)에게 요구한 사실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아산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에 사면되었다.
한성부윤·병조판서를 거쳐 1483년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상인들을 수행하게 하여 상거래를 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직접 관련이 없다고 극구 변명해 처벌을 면했다. 명재상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재물을 탐냈다는 평판을 면하지는 못했다. 시호는 경헌(敬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