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평정하고, 왕이 남으로 피난가면서 매장하였던 춘추사적(春秋史籍)·전교제향(典校祭享)의 의궤(儀軌)을 발굴하였는데, 유구(柳玽)·임박(林樸)과 함께 “국전(國典)은 가히 인멸(湮滅)하게 할 수 없다.”라 하여 살피고 검사하여 거두고 모은 것이 열에 둘 뿐이었다.
1363년 충혜왕의 아들 왕석기(王釋器) 등의 모반음모를 고하지 않은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하옥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1370년 11월 원나라가 망하자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김백안(金伯顔) 등이 동녕부(東寧府)에 웅거하여 북쪽 변방을 침입하므로, 이성계(李成桂), 서북면상원수 지용수(池龍壽) 등과 함께 병마사로서 참전하였다.
1387년(우왕 13) 8월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지밀직(知密直) 이종덕(李鍾德)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갔으나 명나라의 거부로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11월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