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무덤.
연원/역사적 관련 사항
천도 당시 강화로 옮겨 와 살다가 1241년(고종 28) 9월 74세로 사망한 뒤 진강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묘지명에 “명산 옆에 들이 널리 널리 펼쳐져 있고 봉우리가 우뚝 우뚝 솟아 있다.”라고 공의 장지(葬地)를 묘사하였다. 조선시대 지지(地誌)에는 진강산 동쪽 기슭, 백운동(白雲洞)에 묘소가 있다고 전한다.
형태와 특징
봉분 전면에는 2단의 계체석이 설치되어 있다. 1단 계체석 아래로 상석과 향로석, 4각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 석인상과 석양, 망주석이 한 쌍씩 배치되었다. 봉분 전면 우측에는 ‘고려이상국문순공하음백규보지묘(高麗李相國文順公河陰伯奎報之墓)’라 새겨진 묘비(1919년 건립)가 세워져 있으며 진양진씨(晉陽晉氏)와 합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역 내 석물 가운데 사각기둥형 몸체에 큰 머리를 얹은 장승 형태의 고려시대 양식 석인상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후대에 제작된 것이다. 봉분과 사성 등의 구조도 후대에 변형되어 매장 당시 묘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묘역 좌측 아래에는 영정을 모신 유영각(遺影閣)과 묘역정비기념비(1991년 건립), 이규보선생문학비(1983년 건립)가 있다. 우측에는 신도비와 재실인 사가재(四可齋)가 건립되어 있다.
현황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단행본
- 『신편 강화사 증보』(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2015)
- 『강화의 문화유적』(강화군 · 조계종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2)
- 김용선,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학교출판부, 2001)
인터넷 자료
-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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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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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풍수지리에서, 묏자리의 뒤에 작은 맥이 혈의 가를 에워싼 두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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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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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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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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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 탁상 모양을 새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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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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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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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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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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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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