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𤄫)

유교
인물
조선시대 사헌부감찰, 청하현감, 봉화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태원(太原)
낙강(洛江), 낙주재(洛洲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5년(선조 8)
사망 연도
1633년(인조 11)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사헌부감찰|청하현감|봉화현감
정의
조선시대 사헌부감찰, 청하현감, 봉화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태원(太原), 호는 낙강(洛江)·낙주재(洛洲齋).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부호군 증호조참판 이사제(李思齊),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증조는 청평군(淸平君)한언(韓堰)이며, 사과(司果) 한용(韓鏞)의 딸이다.

12세에 이원익(李元翼)의 문하에 들어가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어 김장생(金長生)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번의 학문적 교유는 넓어서 윤황(尹煌) 형제와 정온(鄭蘊)·허후(許厚) 등의 영향도 받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고, 바로 도체찰사였던 유성룡을 수행하며 문서를 관리하고 각종의 명령서를 기초하였다. 이 때의 공로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난 후에 선무공신 1등의 녹권을 받았다.

그 후 사헌부감찰·연산현감·청하현감·봉화현감 등을 거치다가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될 때 대비의 근척(近戚)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인조반정 때 구인후(具仁垕)를 도와 거사하여 성공시킨 후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의 녹권을 사양하고 처향(妻鄕)인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이번의 학문은 실천을 중시하였는데 담박(淡泊)함과 청정(淸淨)함을 좋아하였으며, 자손들의 교육에는 염치(廉恥)를 강조하여 그것이 사람을 금수와 다르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인조와 인목대비가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박홍미(朴弘美)·조즙(趙濈)·유여각(柳汝恪)·정창시(鄭昌詩)·방두원(房斗元)·전경(全儆)과 친하게 지냈는데 당시 사람들이 죽림칠현으로 비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는 『낙주재실기(洛洲齋實記)』가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낙주재실기(洛洲齋實記)』
『소눌집(小訥集)』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