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여(德汝). 이장현(李章顯)의 손자이며, 이헌도(李憲度)의 아들로 좌의정 이헌구(李憲球)에게 입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김복순(金復淳)이다.
1848년(헌종 14) 5월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1864년(고종 1) 충청도감사를 지내고, 1867년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예방승지를 거쳐 1870년 대사헌에 올랐다. 187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4월에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부사 조인희(趙寅熙), 서장관 정원화(鄭元和)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76년 재차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선원보(璿源譜)』 수정에 감인위원(監印委員)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879년 다시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의정부우참찬·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그해 12월 외직인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2년의 임기를 마친 뒤 1882년에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 재직시의 장물을 취득한 일로 인하여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아 고금도에 유폐되었다가 1884년 2월에 향리로 돌아왔고, 그해 말에 풀려났다.
1885년에 복직이 되어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5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거쳐 그 해 10월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886년 약원제조(藥院提調)를 지내고 1888년에 의정부좌참찬·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