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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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요와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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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생활
개념
잠자리에 사용하는 이불과 요 등의 침구. 요 · 이불.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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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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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잠자리에 사용하는 이불과 요 등의 침구. 요 · 이불.
내용

금구(衾具)·침구(寢具)라고도 한다. 우리가 이불과 요를 사용하여온 지는 오래되었으나 명백한 역사를 밝히기는 자료의 부족 등으로 매우 어렵다.

기록상으로 나타난 것을 추려보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수침(繡枕)’·‘침의(寢衣)’라는 말이 보이고, 조선시대의 금침(衾枕) 발기에 이불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또한 현재 보존되고 있는 자료를 통하여 본다면 임진왜란 당시 옥사한 김덕령(金德齡)의 묘에서 나온 이불을 들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것과 별 차이가 없음을 볼 때 예로부터 이부자리는 큰 변화 없이 전승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왕의 이부자리는 색채나 천이 매우 화려하다. 조선시대 궁중의 1,000여점의 발기 중에서 가장 일품인 것은 순종황제 가례 때의 이부자리 발기이다. 별궁용까지 합하면 혼수이불의 수가 무려 560채에 달하고 있는데, 이것이 정월의 결혼이라 솜이불은 그중 단 11채뿐이고 나머지는 누비이불·겹이불·처네이다.

따라서, 여기에 비례하여 겨울용을 더 장만하였다면 600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간추려 정리하여 보면 솜이불·누비이불·처네 등이 있었는데, 누비이불은 다시 오목누비·중누비·세누비로 나뉘고, 처네도 솜과 누비의 두 종류가 있었다. 색채도 남색·초록색·자주색·분홍색·보라색 등 각양각색이었다.

이불보도 역시 화려하여 겨울용은 다홍공단, 여름용은 별문영초(別紋英綃)로 하였다. 일반적으로 궁중이불은 방이 덥기 때문에 솜을 얇게 두며, 추울 때는 그 위에 처네를 포개어 덮었다. 또 하나 민간과 다른 것은 이불잇을 시치는 방법이었다. 왕의 이불은 잇이 거죽으로 넘어오지 않게 시친다.

즉, 흰 서양목이나 서양사(西洋紗)가 이불 표면에 넘어오지 않게 시쳤다. 따라서, 이불을 폈을 때 흰 천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이불 거죽에는 깃 위에다 흰색의 같은 비단으로 동정을 단다. 처네는 이불잇을 안 시치고 동정만 단다. 요잇은 거죽으로 넘어오게 시치지만 민간의 것과 같이 넓지는 않다.

천은 겨울용으로는 도류단(桃榴緞)이 쓰였고, 가을용으로는 수화주(水禾紬)·왜주(倭紬)·장원주(狀元紬)·화방주(花紡紬) 등의 주류가 쓰였다. 여름용으로는 별문영초니 항라니 하는 얇은 옷감이 쓰였다. 이불잇은 여름용에는 모시가, 그밖에는 보드라운 서양사가 사용되었다.

일반 서민이 사용한 것들은 궁중용보다 자료나 기록을 통하여 고증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이불이나 요를 유산이나 가보로 남기는 풍습이 거의 없어 실물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유물은 광주의 충장사(忠壯祠)에 보관되어 있는 이불인데, 이것은 김덕령의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이다. 형태는 요즈음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잠잘 때 사용되는 이부자리는 착포단(著布團)이라는 이불과 부포단(敷布團)이라는 요로 나누어지는데 봄·가을용과 여름·겨울의 구별이 있었고, 사철 따라 솜을 넣어 만들었다. 이불에는 후포단(厚布團)·박포단(薄布團)·자포단(刺布團)·겹포단(袷布團)·단포단(單布團)·경포단(輕布團)·누비이불 등의 종류가 있다.

이들의 겉감은 주로 무명·광목·명주·삼팔주·산동주·마미단(麻美緞)·나사류·모본단 등을 쓰고, 안감은 겉감에 어울리도록 하는데 대개 무명류를 쓴다. 그 빛깔은 남자용과 여자용에 따라 다르다. 남자용의 경우, 몸판은 감색이나 흑색을 주로 하는 침착한 색상을 쓰고 깃에는 자주색·적색 등의 색상을 쓰며, 동정은 백색으로 한다.

여자용은 좀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을 쓴다. 몸판은 초록색을 주로 하고, 깃은 적색·분홍색 등 선명한 색상을 쓴다. 동정은 역시 백색을 사용한다. 속에 넣는 목화솜은 두꺼운 포단(布團)의 경우 보통 15∼20근, 가벼운 포단의 경우 4∼7근을 쓴다.

요의 속은 튼튼한 무명류로서 겉 뒤쪽은 견·무명 등의 두꺼운 것을 쓰고, 겉 안쪽은 흰 무명 같은 것으로 만든다. 색은 뒤쪽에 붙인 포단과 잘 어울리는 색을 써서 남녀에 따라 색상의 취향을 달리하였다. 목화솜의 분량은 6∼10근이다.

이와 같이, 이부자리에는 주로 목화솜을 사용하였는데, 간혹 7월에 피는 부들꽃을 말려서 요에 넣기도 하였다. 또한, 털요로서 누런 개가죽을 사용하고, 여름에는 오소리 가죽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피로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이부자리의 구실에 대한 인식이 강해져서 마치 의상을 고르듯 이부자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불도 몸을 따뜻하게 덮어준다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실내 장식과의 조화도 무시 못할 선택의 조건으로 첨가되었다. 그리고

생활양식이 많이 달라져 온돌에서의 생활 대신 침대를 이용하는 경우가 생겨 점차 전형적인 이부자리 외에 침대형의 이부자리가 병용되는 경향이 있다. 혼수용 이불의 경우 보통 3채·5채·7채와 같이 홀수로 준비하게 되는데 남색·연두색·자주색 등을 쓴다.

계절에 따라 솜을 많이 넣은 겨울용 솜이불, 솜을 조금 넣은 차렵이불·누비이불·겹이불(거죽과 안을 맞추어서 만든 이불), 삼베나 마직물로 된 여름용 홑이불 등을 준비한다. 이불에는 반드시 깃을 달고 깃은 이불의 빛깔에 맞추어 홍색과 남색, 자주와 연두, 연두와 홍색 등으로 배색을 하였으나 요즈음에는 대부분 깃을 달지 않는 경향이다.

그리고 혼수용 요는 2개를 마련하는데 보통 청색·홍색이나 색동으로 한다. 그밖에도 조각을 모아 섬세하게 이어 붙인 조각이불, 자수를 놓아 만든 여름용 겹이불, 무늬가 매우 화사한 담요 등 용도에 따른 각종 이불을 준비한다.

요즈음은 옛날과 달리 목화를 많이 재배하지 않기 때문에 이부자리에 목화솜 대신 화학솜·명주솜을 사용하여 만드는 경향이 높아졌다. 화학솜은 흡습성이 적고 열에 약하지만 촉감·탄력이 좋고 가벼워 요보다는 이불에 많이 애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불잇이나 요잇의 경우, 사방을 시치는 것보다는 자루처럼 만들어 씌워 일일이 꿰매는 수고를 덜고 있다.

참고문헌

『이조여류문학 및 궁중풍속(宮中風俗)의 연구』(김용숙,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70)
『한국고미술』(문화재관리국, 광명출판사, 1974)
『고려도경(高麗圖經)』
『朝鮮の服裝』(朝鮮總督府,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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