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공(李應公)의 아들이다. 처음에 중이 되었으나 환속하여 관성현령(管城縣令)이 되었다. 충렬왕의 사랑을 받아 내원승(內園丞)을 거쳐 낭장이 되었다.
1282년(충렬 8) 12월에는 장군으로 여러 주현(州縣)의 관리의 부정유무를 규찰하였으며, 1285년 충청도안집사(忠淸道安集使)로 있을 때 미색(美色)을 뽑아 바치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1286년 2월 충청도의 탈탈화손(脫脫禾孫: 元代 各路에 설치되었던 驛站統制官으로 驛站吏의 비위를 감시한 직)으로 있을 때 영월현령 이순(李恂)과 함께 횡포가 심하였기 때문에 강윤명(康允明)의 난을 유발하였다.
1298년 9월 군부판서 응양군상장군(軍簿判書鷹揚軍上將軍)이 된 뒤에도 계속 탐학과 가렴주구로 토지를 빼앗는 등 비행이 많아서 파직되었다.
1299년 정월에는 중 일영(日英)의 무고로 모반하였다고 몰려 만호(萬戶) 한희유(韓希愈)와 함께 2월에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가 4월에 풀려났으나, 원에서 온 탑해(塔海)와 활활불화(闊闊不花)에 의해 한희유·유비(柳庇) 등과 같이 원나라에 잡혀 갔다가 이듬해 윤8월에 돌아왔다. 1300년 11월에 밀직부사 군부판서(密直副使軍簿判書)가 되었으며, 12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를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