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같은 해 공안부소윤(恭安府少尹)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巡軍) 윤종(尹琮)을 구타한 죄로 한 때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평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고, 1406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와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직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성부윤을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고,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 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永吉道都巡問使)를 거쳐, 이듬 해 6월 예조판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 판한성부사, 5월 병조판서,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 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했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정탁(鄭擢)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丁夫) 32만 5000여 명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토성이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1425년 등극사(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 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부귀가 모이자 지나친 위세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급기야 공신녹권까지 박탈당하고 고독한 귀양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있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서가집(西佳集)』
- 『용헌집(容軒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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