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통산군(通山君)에 봉해졌으며, 1379년(우왕 5) 충주단양도병마사(忠州丹陽道兵馬使)에 임명되었다. 1381년 왜구가 지리산에서 도망하여 무등산으로 들어가 규봉산(圭峰山) 바윗돌 사이에 목책(木柵)을 세웠는데, 삼면이 절벽이고 오직 작은 비탈길이 있어 겨우 한 사람만이 통행할 수 있었다.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로서 결사대 100명을 모집하여 높은 곳에 올라 돌을 굴려내리고 불화살을 쏘아 목책을 불사르니, 많은 왜적이 죽었고, 나머지 왜적은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彦)이 배로 추격하여 모두 죽이고 13명을 생포하였다. 같은 해 10월 왜구가 반남현(潘南縣)을 노략질하자, 원수(元帥) 지용기(池湧奇)와 함께 물리치고 배 1척을 잡아서 불태웠으며 9명의 목을 베었다.
1383년 지문하사(知門下事)로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가 되어 홍천현을 함락시킨 왜구를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함께 싸워 5명의 목을 베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병마사 곽충보(郭忠輔) 등과 함께 동산현(洞山縣: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에 침입한 왜구를 쳐서 20여 명의 목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여 백금 50냥(兩)을 받았다.
1385년 다시 강릉도원수에 임명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그러나 1387년 양구현 사람 양부(楊富)의 아내를 강간한 죄로 서인이 되고, 장(杖) 100을 받고 회덕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왔다. 이듬해 요동정벌 때 팔도도통사 최영(崔瑩),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팔도도통사조전원수로서 출전하였다.
1389년(창왕 1) 김저(金苧)의 옥사에 연루되어 문하평리(門下評理) 이거인(李居仁) 등 26인과 함께 유배되었다. 1392년(태조 즉위년) 7월 고려의 대신 56인을 폄출할 때 장(杖)을 받고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