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취죽(翠竹)·죽창(竹窓). 세종의 7대손이며, 풍양령(豊陽令) 이춘(李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몽상(李夢祥)이다. 아버지는 이정신(李廷臣)이며, 어머니는 정휴복(鄭休復)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43년 장령(掌令)이 되고, 16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 해에 여색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직산에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사간·교리·승지·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1652년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54년 함경도관찰사로 파견되었는데, 도내의 궁벽진 곳을 스스로 돌아보고 미비점을 계(啓)로 올렸다.
이로 인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 일습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1655년 도민이 청나라에 월경하여 살인한 사건으로 청나라의 항의를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승지에 기용되고, 1658년 대사간,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
효종이 죽자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생활이 검소하며 관직에 충실하여 사람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재현(才賢)을 제대로 천거하지 못한다 하여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