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4책. 활자본. 선조의 명에 따라 교정청(校正廳)에서 행한 사서삼경의 언해사업으로 『대학언해』 · 『중용언해』 · 『맹자언해』 · 『소학언해』 등과 함께 간행되었다. 위 언해본과 함께 원간본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편찬과 간행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함께 간행된 『소학언해』의 범례와 발문(跋文) 및 관여관원열함(關與官員列銜), 그리고 『논어언해』의 ‘만력십팔년칠월일(萬曆十八年七月日)’이라는 내사기(內賜記)로 보아 이산해(李山海) · 정철(鄭澈) 등 당대의 대표적 유신들 31인이 참여해 1590년(선조 23)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인 한문을 앞에 싣고 뒤에 언해를 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원문에는 한글로 된 토와 한자음이 있고, 언해문에도 한자와 한자음이 표기되어 있다. 언해문과 현실한자음에 따라 표기된 한자음에는 방점이 찍혀 있다. ㅿ과 ㆁ이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이본(異本)이 전한다. ‘만력사십년구월일(萬曆四十年九月日)’, ‘숭정사년윤십일월일(崇禎四年閏十一月日)’의 내사기가 있는 책이 있는데, 각각 1612년(광해군 4) · 1631년(인조 9)에 간행된 책이다. 전자는 1590년본을 따라 방점과 ᅀᅠ, ᄠᅳᆷ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세경오중춘개간전주하경룡장판(歲庚午仲春開刊全州河慶龍藏板)’, ‘임오신간영영장판(壬午新刊嶺營藏板)’, ‘임술계춘영영중간(壬戌季春嶺營重刊)’의 간기(刊記)를 가진 책들이 있다. 각각 1810년(순조 10) · 1820년(순조 20) · 1822년(순조 22) · 1862년(철종 13)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간기를 알 수 없는 이본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즉 10행 17자본, 10행 19자본, 10행 23자본이다. 그러나 그 표기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이(李珥)가 언해한 『논어율곡언해(論語栗谷諺解)』이다. 이것은 개인이 언해한 책이기 때문에 다른 논어언해와 차이를 보인다. 특히 『논어율곡언해』가 원문의 한자를 언해문에 그대로 사용하여서 원뜻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한 반면, 다른 논어언해는 일반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순수국어를 더 많이 사용한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원문에 달린 토에는 큰 차이가 없다.
도산서원본은 유학의 연구에도 중요하지만, 『효경언해』와 함께 원간본으로서 방점을 가지는 최후의 문헌으로 중세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다른 이본들은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변하는 과정의 국어사연구를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도산서원본은 1974년 한양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영인하였고, 다시 1976년 대제각에서 영인하였다. 내각장판본도 대제각에서 영인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