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기(內賜記)는 임금이 특정 신하 또는 기관에 책을 내려 줄[內賜, 頒賜] 때의 경위를 기록한 문건이다. 즉 임금이 ‘언제, 누구에게, 무슨 책 몇 건을 내려 주며, 이에 대한 감사는 표하지 말 것[命除謝恩]’ 등을 표시한 기록을 일컫는다. 이러한 내사기로 재위 임금 당시 어떤 서적을 누구(개인 · 관청)에게 하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내사기는 그 당시 출판문화의 추세와 시대 정황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내사기(內賜記)는 임금의 명[命, 命令]에 의하여 특정 신하 또는 관청[官廳, 官署]에 책을 하사할 때 승정원(承政院) 같은 곳에서 그 내용을 기록하는데, 일반적으로 앞표지[表紙]의 이면(裏面) 면지(面紙)에 ‘붓으로 그 내용을 기록[墨書]’한 것이다. 임금이 특정 신하에게 하사한 책을 ‘내사본(內賜本)’ 또는 ‘반사본(頒賜本)’이라고 한다. 이때의 ‘내(內)’는 ‘궁궐 및 임금’을 지칭하는 의미이다. 즉 ‘임금님께서 내려주시는 책’이라는 의미이다.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책에는 내사기를 묵서(墨書)로 써서 하사하는 것이 원칙이다. 내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내사년월(內賜年月): 책을 반사한 연월(年月)을 기록한다. ‘일(日)’자는 적혀 있으나 그 구체적인 날짜는 기록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②수취인(受取人) 직함 · 성명: 책을 반사 받는 사람[被頒賜者, 受取者]의 직함 및 성명이 구체적으로 적시(摘示)된다.
③내사 서명(書名) · 건수(件數): 내사하는 책의 서명 및 건수가 적혀 있다,
④명제사은(命除謝恩): ‘책을 내려 준 임금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별도로 표시하지 말 것’을 나타낸다.
⑤내사 실무자(內賜實務者): 이 사항은 ‘㉠내사 실무자의 직함, ㉡실무 담당자의 성씨, ㉢담당자의 수결(手決: sign)’이라는 3개의 항목으로 구성된다.
내사기는 이상의 다섯 사항으로 기록되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이러한 내사기의 기록을 ‘선사지기(宣賜之記)’라고도 한다.
임금이 관청에 하사하는 책일 경우, ‘①책을 반사한 연월[頒賜年月], ②책을 반사 받는 관서명[官署名, 受取處], ③책의 서명 및 건수’가 기록되고, 이때는 ‘명제사은’ 사항은 생략된다. ④’내사 실무자(實務者)의 직함과 성씨 및 수결’의 4개 사항이 기록된다.
내사기의 특징은 ‘내사년월’을 반드시 기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사본이 활자본[金屬活字本]일 경우, 내사기는 해당 도서의 간인(刊印) 연도를 실제에 거의 가깝게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대부분의 반사본의 경우, 그 활자본이 인출(印出)된 당해 연도에 반사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반사본은 임금의 하사품이므로 책의 지질(紙質) · 장정(裝幀) · 인쇄의 상태가 양호하고, 또 본문의 교정(校訂)이 철저하여 오자(誤字)와 낙자(落字)가 없는, 우아하고 정교한 관판본(官版本)임을 들 수 있다. 특히 관주활자(官鑄活字)로 찍은 반사본은 동양의 삼국 중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과 우수성이 부각된다. 그 밖에, 내사본은 임금이 해당 가문의 특정 조상에게 내려 준 하사품인 까닭에 그 후손들이 가문의 최대 명예로 여겨 오늘에까지 고이 간직해 왔으므로, 귀중한 전적문화유산(典籍文化遺産)을 온전하게 보존한다는 시각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내사본을 하사할 때, 내사기의 기록과 함께 내사본을 내려 주는 해당 기관의 직인(職印: 內賜印(내사인))’을 본문의 첫 장 우측 상단(右側上段: 卷頭題에 겹쳐서)에 찍어서 증빙하기도 한다. 실제로 권두제명(卷頭題名) 위에 겹쳐서 ‘선사지기’, ‘규장지보(奎章之寶)’, ‘동문지보(同文之寶)’, ‘흠문지보(欽文之寶)’ 등등의 보인[寶印, 內賜印]이 찍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사인은 ‘반사인(頒賜印)’이라고도 한다.
내사기의 실제 사례로, 정조(正祖) 임금이 어명을 내려 어정규장정운(御定奎章全韻)을 간행한 바 있는데, 이 책의 내사기로,
“同治元年(1862) 閏八月日 京卜/ 對策三下幼學趙鉉冀/ 內賜奎章全韻一件/ 命除謝/ 恩/ 待敎臣趙 [手決]”[세로 行으로 記載되어 있음. ‘頒賜年月’의 첫 번째 글자는 한두 칸 내려서 씀. ‘命除謝恩’의 ‘命’字는 반사 연월의 첫 글자보다 한두 칸 올려서 씀. ‘恩’字는 독립된 새로운 行에, 그 첫 번째 글자로 올려 씀.]이라 기록하고 있다.
①‘同治元年(1862) 閏八月日’은 ‘반사 연월’에 해당한다. 즉 ‘1862년 윤8월에 이 책을 반사한다’라는 것이다.
②‘對策三下 幼學 趙鉉冀’은 ‘책을 받는 사람[被頒賜者]의 직함 및 성명’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대책 삼하(對策三下)’는 과거(科擧) 시험의 소과[小科, 初試: 生員 · 進士科] 시험에서 12등급 중 아홉째 급, 즉 ‘셋째 등(等)의 셋째 급’ 자격을 획득하였다는 말이다. ‘유학(幼學)’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지만, 대과(大科)의 과거 시험에 임하지 못하여,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유생(儒生)을 일컫는 말이다. ‘조현기(趙鉉冀)’는 책을 하사 받은 사람의 성명이다.
③‘內賜 奎章全韻 一件’은 내사하는 책의 서명이 ‘규장전운(奎章全韻)’이며, 그 ‘일건[一件, 한 벌]’을 반사한다는 의미이다.
④‘命除謝恩’은 ‘임금이 베풀어 준 은총[恩]에 대한 인사[謝]는 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은(恩)’은 ‘임금의 은총’을 의미하기 때문에, ‘명제사은’에서 ‘은’자만 그 다음 행에 독립시켜서 쓰는 방법, 즉 ‘독립된 행의 맨 위의 첫 글자 한 글자만 쓴다’라는 점이 내사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⑤‘待敎 臣 趙 [手決]’에서 ‘대교(待敎)’는 규장각(奎章閣) 실무자의 직급(從七品~正五品)을 말하며, ‘신(臣) 조(趙) [+] 手決(sign)’는 실무자의 성씨를 기록한 다음에 바로 수결함으로써, 반사 대리자의 성씨와 사인(sign)을 직접 남긴다는 특징을 보인다.
위의 ‘1862년 내사기 어정규장전운’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상주(尙州) 출신의 가규(可畦) 조익(趙翊, 15561613)(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의 친동생) 선생의 문중(門中) 종가(宗家)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서이다.
위와 같이 왕으로부터 책을 하사 받은 장본인(張本人)은 물론이고 그 가문 자체의 영광이었기 때문에, 해당 가문의 귀중서(歸重書) 중의 귀중서 전적(典籍)으로 엄중하게 보존되었다. 한편, 내사본을 하사 받은 해당 가문의 후예[後裔, 後孫]들은, 자랑스러운 조상(祖上)의 ‘성명’ 부분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이름자 위의 부분에 별도의 종이를 오려 덧붙여 피휘(避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내사기에 간혹 수취자(受取者)의 성명 부분이 잘려 있거나 먹[墨]으로 덧칠한 경우도 볼 수 있다. 흔히 그 수취자가 역모(逆謀), 대역죄(大逆罪), 기타 범죄 등을 지질렀을 때 가문의 수치라 하여, 영예롭게 하사 받았던 서적에서, 해당 수취자의 생전이나 사후에 그 이름자를 도려내기도 하였고, 훗날 후손들이 가문의 유물을 처분할 때,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로 바깥으로 나돌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미리 그 이름을 지우고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해당 전적(典籍)은 그 수취자의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내사기 사진 삽입 필요/
고려시대의 기록에 ‘반사’에 관한 사항은 “1045년(靖宗 11) 4월에, 비서성(秘書省)에서 예기정의(禮記正義) 70부, 모시정의(毛詩正義) 40부를 간행하여, 어서각(御書閣)에 1부만 소장하고 나머지는 문신들에게 반사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1096년(肅宗 1) 7월에, 임금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역대(歷代)에 소장한 책을 열람한 후, 부질(部帙)이 완전한 책은 문덕전 · 장령전(長齡殿)의 어서방(御書房) · 비서각(祕書閣)에 나누어 소장하게 하고 나머지는 재신(宰臣) · 관원(官員) · 문신(文臣)들에게 차등 있게 반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내사기는 조선 ‘세종 22년(1440) 8월 을묘일(乙卯日, 10일)에 내린 전교(傳敎)’가 제도화되어 실시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 주자소(鑄字所)에서 찍은 책을 반사 받았을 때, 모든 수취자는 조정으로부터 하사 받은 2개월 이내에 제본[製本, 粧冊]하여 승정원에 제출하고, ‘선사지기’를 받아야 한다.”라는 규정이다. 승정원에서는 반사한 서적에 ‘선사지기’를 날인(捺印)하여 주는 이유는, 그 책의 제본이 잘 되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사지기’라는 새보(璽寶)만을 찍어 준다고 하여 제본 상태를 완전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서적이 어느 때, 누구에게 반사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보다 중요한 요소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내사기’의 기록 형식이 차츰 완비되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내사기는 시대에 따라 그 서식에 다소 변형이 있음을 볼 수 있으나, 내용 자체에는 변화가 없이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다.
내사기는 세종대 이후 국가에서 필요한 서적을 간행하였을 때, 이 서적이 요구된다고 예상되는 특정 신하 또는 관청을 미리 지정하고, 임금이 그들에게 해당 서적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책의 앞표지 뒷면에 묵서로 남긴 기록을 말한다.
내사기는 임금의 재위(在位) 당시 언제 무슨 서적을 누구(개인 · 관청)에게 지정하여 어느 정도 하사하였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 당시 출판문화의 추세와 시대 정황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