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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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신하에게 하사하는 내사본 서적에 날인하는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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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선사지기는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신하에게 하사하는 내사본(內賜本) 서적에 날인(捺印)된 국새(國璽)이다. 즉, 왕명으로 서적을 반사(頒賜)할 때 내사기(內賜記)를 작성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찍은 어보(御寶) 도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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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신하에게 하사하는 내사본 서적에 날인하는 국새.
내용

선사지기(宣賜之記)는 왕명(王命)으로 서적을 반사(頒賜)할 때 내사기(內賜記)를 작성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찍은 어보(御寶) 도장을 말한다. 조선시대 서적 반사(頒賜) 때 내사기를 증명하는 어보는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그 밖에 ‘규장지보(奎章之寶)’ · ‘흠문지보(欽文之寶)’ · ‘동문지보(同文之寶)’ · ‘선황단보(宣貺端輔)’ 등이 있었다. 간혹 어보가 아닌 ‘승정원인(承政院印)’과 같은 관인(官印)이 보이기도 한다. 대한제국 때에는 ‘흠문지새(欽文之璽)’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내사본(內賜本)에 기록되는 내사기의 내용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어보는 세종대에 만든 ‘선사지기’가 가장 이른 사례에 해당한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여타의 어보를 찍기 시작하면서 그 변화가 나타난다. 내사기에는 왕이 반사한 서적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누구에게 무슨 책을 몇 권 반사하였는지 등의 내용을 기록한다. 이러한 내사기에 더하여 해당 책의 첫 장(張: 卷頭題面)에 어보를 찍음으로써, ‘특정 서적을 특정인 등에게 하사하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 바로 ‘내사인(內賜印)’이다. 위 ‘선사지기’라는 어보는 최초의 내사인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에 관한 기록으로는, “1440년(世宗 22) 8월,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주자소(鑄字所)에서 모인(模印)한 서적을 각 품계에 따라 반사하였는데, 받은 자가 장황(粧潢)을 게을리하여 훼손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세종은 ‘서적을 받은지 3개월 이내에 제본한 후, 승정원에 제출하여 ‘선사지기’ 어보를 받도록 하고, 이를 영구한 법식으로 삼으라.’”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이후로 조선시대 서적의 반사에 가장 많은 사용 빈도를 보이고 있는 어보가 바로 ‘선사지기’이다.

선사지기가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는, 1437년(세종 19)에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로 간행된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薄議)』로, 현재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간행된 서적으로는 1447년(세종 29) 10월에 반사한 목판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1448년(세종 30) 10월에 반사한 『동국정운(東國正韻)』 활자본이 있다. 『동국정운』은 1447년 9월에 완성되어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 ‘10월, 성균관(成均館) · 사부학당(四部學堂) 등에 보급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 간행 시기와 보급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 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목활자(木活字)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甲寅字)이다. 본문의 큰 글자는 진양대군(晋陽大君, 뒤에 世祖)의 글씨로 전한다. 책 1면 변란의 안쪽 구석에는 세종대에 제작한 선사지기 인장이 있어 반사본(頒賜本)임이 증명된다.

선사지기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잃어버렸다가 1624년(인조 2) 한 차례 개주(改鑄)하였다. 이때 개주한 선사지기는 1675년(숙종 1) 홍주국(洪柱國)에게 반사한 『고사촬요(故事撮要)』에서 확인할 수 있다. ‘8㎝의 주문방인(朱文方印)’으로 종전의 것을 모방하여 제작한 듯하나 보문(寶文)의 서체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며, 변곽이 두꺼워졌다. 또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를 통해 1876년(고종 13) 12월 28일에 한 차례 마련취색(鍊磨取色)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인소의궤에 따르면 개주한 선사지기의 재질은 은(銀)이며, 인꼭지는 직뉴(直鈕)이다. 인면의 길이는 방 8㎝(2촌 9푼), 곽광(郭廣)은 2.7㎜(1푼), 직뉴의 높이는 5.24㎝(1촌 9푼), 두께는 2.2㎝(8푼)이다. 직뉴의 중앙에는 횡혈(橫穴)이 있으며 서체는 소전(小篆)이다.

현존하는 ‘선사지기’는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재질은 무게로 보아 은이 아니므로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도금한 어보를 ‘금(金)’으로 기재하거나, 주석 합금을 ‘은(銀)’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남은 선사지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국왕 문서를 포함한 서적 반사용 어보로 현존하는 유일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논문

강순애, 「규장각의 도서반사에 관한 연구」(『계간 서지학보』 창간호, 한국서지학회, 1990)
백린, 「내사기와 선사지기에 대하여」(『국회도서관보』 8, 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69)
윤병태, 「내사기와 선사지기」(『도서관학연구지』 8, 숭의여자전문학교 학도호국단도서관학연구반, 1983)
中村榮孝, 「朝鮮官板の內賜記と國王印にいいて」(『韓國學報』 25, 1962)
집필자
김성수(청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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