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본·관간본·관각본이라고도 한다. 목판본과 활자본 등 여러 형태가 있으며, 간행관서에 따라 구분된다. 그 중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비서성본(祕書省本) 고려 때 경적(經籍:經書)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비서성에서 간행한 책. 비서성은 고려 태조가 설치한 내서성을 995년(성종 14)에 개칭한 중앙관서로 1045년(정종 11) ≪예기정의 禮記正義≫와 ≪모시정의 毛詩正義≫를 간행하였다.
그 뒤에는 지방관서에 판각하게 하여 그 책판(冊板)을 받아 비각(祕閣)에 보관, 관리하면서 책을 인쇄하여 보급하였다. 책판이 쌓여 이용이 불편하게 되자 1101년(숙종 6)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고 그곳으로 옮겨 널리 간행하게 하였다.
(2) 대장도감본(大藏都監本) 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하여 중앙에 임시로 설치한 대장도감에서 간행한 책. 고려시대 때 대장경의 판각은 두 차례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고려 현종 초기에 대거 침입해온 거란(契丹)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거국적으로 발원하여 1011년(현종 2) 무렵 판각에 착수, 1087년(선종 4)에 일단락시킨 것이다. 이것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한다.
이 대장경은 동양에서 최초로 간행된 북송(北宋)의 개보칙판(開寶勅板) 대장경에 이어 두 번째로 착수한 것인데, 개보칙판을 비롯하여 거란대장경, 개보칙판 이후에 개판된 장경, 그리고 송나라의 신역경론(新譯經論)을 모두 포괄한 가장 방대한 한역대장경이며, 그 판각술도 매우 정교하였다.
두 번째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대거 침입, 초조대장경판이 병화(兵火)로 타버리자 1232년(고종 19)에 강화로 천도하여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다시 간행해낸 것이다. 이를 재조대장경이라 일컫는다. 그 판각은 1236년에 시작되어 1251년에 완성되었으며, 본사는 강화에 두고 분사는 남해의 섬에 두었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비롯, 북송대장경·거란대장경과의 대교(對校)는 물론, 각종 불경목록을 두루 참고하여 본문을 바로잡아 간행하였으므로 그 본문 내용이 동양의 어느 한역대장경보다 우수하다고 국내외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 경판수는 무려 8만1천여 판에 이른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방대한 양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형으로 보존되고 있어 세계적인 인쇄문화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3) 교장도감본(敎藏都監本) 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인 의천(義天)의 주관 아래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간행한 속장경(續藏經). 속장경은 한역대장경의 정장(正藏)에 대하여 동양 학문승들이 연구, 저술한 것과 주석한 장소(章疏)를 말한다.
의천이 송나라의 여러 지방을 순방하여 수집한 장소를 비롯하여 요(遼)·일본과 우리 나라 안에서 두루 수집한 4천여 권에 의거, 1091년(선종 8) 그 간행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엮고, 판각을 시작하였다. 간행을 마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주관자인 의천이 입적한 1101년(숙종 6) 무렵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속장경의 완전한 간행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동양 학문승들의 장소를 최초로 집대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속장경의 현존 원각본이 여러 종 전래되고 있는데, 달필의 서예가들이 쓴 판하본을 철저하게 교감하여 정성껏 새겨내었음을 알 수 있고, 그 판각술의 정교도는 당시 고도로 발달하였던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부각시켜준다.
(4) 서적원본(書籍院本) 고려의 중앙관서인 서적원에서 찍어낸 책. 서적원 설치에 관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서적점(書籍店)의 명칭은 문종 때에 나타나고 있다.
녹사(錄事:문하부의 종7품 벼슬) 2인으로 업무를 임시로 맡게 하고, 그 아래 이속(吏屬:모든 관아의 구실아치)으로서 기사(記事)·기관(記官)·서자(書者) 각 2인을 두어 실무를 맡게 하였다. 책의 인출업무를 관장한 비서성의 분사인 것으로 보인다.
1101년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마련하고 비서성의 책판을 옮겨 교육에 필요한 책을 자유롭게 찍어 볼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위에서 든 서적점과는 달리 별도로 마련한 기구인 듯하다. 문종 때 설치된 서적점은 그 뒤 여러 차례 개폐의 변화가 있었으나, 고종 때까지 존속하면서 책을 찍어 보급하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1212년(강종 1) 서경(西京)의 여러 학원이 판각한 ≪서하문집 西河文集≫의 책판을 개경의 서적점으로 보내어 관리하게 하면서 인쇄, 보급한 사례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여기서 처음에는 목판인쇄를 맡아오다가 뒤에는 주자인쇄까지 맡아 하였다. 13세기 전기에는 주자(쇠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활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강화로 천도한 1239년에 번각한 것이 전래되어 있고, 강화에서 주자로 ≪상정예문 詳定禮文≫을 28부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뒤부터는 주자인쇄기능이 마비되었고, 불요불급한 관직이 통폐합되면서 서적점이 한림원(翰林院)에 합병되었다.
그 뒤 공민왕 때 다시 서적포를 설치하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은 물론 의서·병서·율서에 이지 고루 찍어내어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를 널리 권장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1392년(공민왕 3) 정월에 서적원이 다시 설치되고 주자인쇄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서적원은 목판본과 주자본의 관판인쇄를 맡아 책을 찍어 유통시켰다.
(5) 간경도감본(刊經都監本) 조선 세조가 불경을 간행하기 위하여 1461년(세조 7) 6월에 설치, 1471년(성종 2) 12월까지 11년간 존속하였던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책. 세조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승하, 단종폐위 때의 인명살상, 세자 덕종(德宗)의 죽음 등으로 인하여 호불(好佛)로 기울어져 불교를 숭상하고 불경을 간행해오다가, 마침내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불경의 간행과 국역사업을 촉진시켰다.
그 사업에는 당대의 고위관리가 대거 참여하여 도제조·제조·부제조·사·부사·판관의 직위를 맡고, 고승들이 총동원되어 국역과 교감업무를 담당하였다. 장소계통을 간행한 것이 특징이고, 국역은 주요 불전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때의 간경체제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서울에 본사, 지방에 분사를 두었다. 그 분사는 기록에 의하면 상주목·진주목·전주부·안동부·남원부·개성부 등이 있다. 이 간경도감본은 당대의 명필가들이 총동원되어 송설체로 정성껏 써서 새겨낸 것이 그 특징이다.
(6) 교서관본(校書館本) 조선에서 경적의 인출, 반사(임금이 물건이나 녹봉을 내려 나누어 주는 것)와 향축(香祝: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그리고 인장·전각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서인 교서관과 그 소속의 주자소에서 간행한 책. 교서관은 조선 태조가 1392년 고려관제에 따라 설치했던 교서감(校書監)을 1401년 개칭한 것으로 1466년에 전교서(典校書)로 개칭하였다가 1484년에 다시 교서관으로 환원시켰다. 1777년(정조 1)에 규장각이 설치된 뒤에는 외각(外閣)으로 편입하여 인쇄업무를 전담하였다.
여러 종류의 활자를 만들어 주자본을 다양하게 찍어낸 것이 특징이지만, 오랜 시일에 걸쳐 다량으로 공급하여야 하는 책은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교서관은 서적을 인쇄하여 반사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그 주된 임무의 하나였다.
그 반사에 있어서 주자본은 인출부수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왕실과 관련된 관서, 그리고 일부의 제한된 유신들에게 반사되었다. 그러나 목판본은 그런 제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사의 범위는 훨씬 넓었다.
관서에서 반사하는 책의 내용은 관서의 성격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비롯한 유교서적은 주로 성균관·오부학당·향교·서원, 그리고 지방감영 등에 반사하였고, 특수주제의 책은 각각 해당관서에 반사하여 이용의 효율화를 도모하였다. 책의 간행조건은 다음의 내각본과 함께 가장 정교하며 본문에 오자와 낙자가 별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7) 내각본(內閣本) 조선 정조가 즉위한 1777년에 설치한 규장각에서 간행한 책. 내각은 규장각의 별칭이다. 규장각의 설치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어진·고명(顧命:임금의 유언)·유교(遺敎)·선보(璿譜:璿源 譜牒을 간략하게 기록한 책)·지장(誌狀)을 비롯한 전적의 보존 등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와 관리의 음모 및 횡포를 배제하여 정치와 행정의 기능을 강화하며, 학식이 높은 신하를 모아 경사(經史:경서와 사기)를 토론하게 하고, 여러 주제의 책을 편찬, 간행하여 학술과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내각에서는 각종 주제의 도서를 편찬하고 그것을 간행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그 간행은 내각의 주관 아래 외각인 교서관이 맡아 실시하였다.
그 간본에는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임인자(壬寅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 등의 활자본이 다양하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다량의 보급이 필요한 것은 목판본으로 찍어내었다.
이들 책은 위에서 든 교서관본과 같이 매우 정교하고 본문에 오자와 낙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관판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8) 훈련도감본(訓鍊都監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설치된 병영인 훈련도감에서 간행한 책. 당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장정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으나, 전란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서 장정을 양성하기에는 국가재정이 빈약하였다.
그리하여 둔전(屯田:각 궁과 관아에 딸린 밭. 주둔병의 군량을 지급하기 위해 마련된 밭)을 경작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여 장병들이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팔아서 그 비용으로 경비의 일부를 충당하였다.
이때 만든 목활자의 자본(字本)은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에서 취하였다. 여러 훈련도감자본을 조사해보면 갑인자체·경오자체·을해자체·갑진자체·병자자체를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술이 부족한 장병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조잡하고 자체가 정연하지 못한 편이다.
이 훈련도감자본은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후기부터 간행되기 시작하여, 광해군 때를 거쳐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까지, 약 반세기 동안에 걸쳐 이용되었다. 따라서 그 종류가 비교적 많이 전래되고 있다.
(9) 관상감본(觀象監本) 천문·지리·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누각. 물시계의 한가지)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서인 관상감에서 간행한 책. 관상감본에는 활자본과 목판본이 있다. 관상감은 서운관(書雲觀)이라고도 일컬었으며, 주로 책력을 인쇄, 반포하였고, 그 밖에도 천문·역상과 역점(曆占)에 관한 책도 간행하였다.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 遣閑雜錄≫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전에 벌써 주자를 만들어 역서를 찍어내었다고 한다.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가 되어 진두 지휘할 때 갖고 다니며 훈령과 전황을 기록하였던 ≪대통력 大統曆≫을 보면 모두 철주자(鐵鑄字)로 찍혀 있다.
이 활자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관상감활자(일명 印曆鑄字)이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목활자에 섞여 역서의 인출에 사용되었다. 그 뒤 역서는 각종의 활자와 목판으로 간행, 반포되어 그 종류가 다양하다.
(10) 사역원본(司譯院本) 외국어의 통역과 외국과의 통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역원에서 간행한 책. 사역원은 일명 통문관(通文館)이라고도 한다. 통역관의 양성에 필요한 어학책은 중국어·몽고어·청국어·일본어 교재이며, 그 종류가 다양하게 판각되었다. 오늘날 이들 교재는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한 것보다는 우리의 옛 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1) 학부간본(學部刊本)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내각관제의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지식의 보급을 위한 국민교육용 교과서가 필요하여 학부에서 간행한 책. 당시 학부 편집국에서는 시급히 새로운 교과서를 많이 찍어 보급해야 하였으므로 10여년 전에 이미 도입해 사용하고 있던 신식 연활자(新式鉛活字)를 사용하였을 법한데, 이렇듯 우리의 재래활자와 그것을 자본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교서관이 18세기 초기에 두 번째로 인서체철활자를 만들어 19세기 중기 무렵까지 사용하다가 마멸이 심하여 따로 두었던 것을 다시 이용하고,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를 다량으로 만들어 섞어 쓴 것이다.
활자 중에 자획이 가늘게 마멸되고 자형이 일그러진 것은 후기교서관인서체철활자이다. 이 활자로 찍은 ≪증수무원록언해 增修無寃錄諺解≫와 대비하여볼 때 그 사실이 입증된다.
(12) 그 밖의 중앙관서 간본 위에서 든 중앙관서 이외에도 특수관서에서 찍어낸 책 중에는 종부시간본(宗簿寺刊本)·내의원간본(內醫院刊本)·혜민서간본(惠民署刊本)·장악원간본(掌樂院刊本)·군기시간본(軍器寺刊本) 등이 있다. 그 간본의 종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13) 지방관판본(地方官版本) 지방관서에서 간행한 책. 고려시대의 관판본은 대장경과 1045년에 비서성이 간행한 ≪예기정의≫·≪모시정의≫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지방관서에 명하여 새긴 책판을 중앙으로 올려보내게 하여 인쇄, 보급하는 정책을 써왔다. 1042년에 동경관(경주)이 ≪전한서≫·≪후한서≫·≪당서≫를 새겨 그 책판을 비각에 올려보낸 것이 최초의 기록이 된다.
그 이후 고려 말기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지방관서의 판각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조선 세종 때 명나라에서 도입한 ≪사서대전≫·≪오경대전≫·≪성리대전≫을 경상도·전라도·강원도 관찰영에 나누어 새겨 그 책판을 중앙으로 보내게 하고, 책 종이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 관찰영에 명하여 만들어 보내게 하여 인쇄, 보급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지방관서가 필요한 책을 임의로 판각하여 그 책판을 자체에 간직해두고 인쇄, 보급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활자로 책을 다양하게 찍어 지방관서에 한 부씩 보내주는 데 힘썼다.
그러면 지방의 각 관서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다시 번각(翻刻)하여 널리 펴내는 것이 조선시대 인쇄정책의 특징이다.
이러한 지방관판본은 관서의 명칭에 따라 세분된다. 이를테면 기영(畿營)·금영(錦營)·원영(原營)·완영(完營)·영영(嶺營)·기영(箕營)·해영(海營)·함영(咸營) 등의 8도 감영이 간행한 책을 기영본 또는 기전관찰영본, 금영본 또는 호서관찰영본, 원영본 또는 관동관찰영본, 완영본 또는 호남관찰영본, 영영본 또는 영남관찰영본, 기영본 또는 관서관찰영본, 해영본 또는 해서관찰영본, 함영본 또는 관북관찰영본이라 각각 일컫는다.
부(府)가 간행한 책은, 이를테면 경주부본·안동부본·개성부본 등이라 부른다. 목(牧)이 간행한 책은 이를테면 상주목본·진주목본·충주목본 등이라고 부르며, 군현의 관서가 간행한 책은 청도군본·영천군본·의성현본·무안현본 등이라고 부른다. →인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