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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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조직지심체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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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를 조판하여 찍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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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활자본은 활자를 조판하여 찍어낸 책이다. 심괄의 『몽계필담』에 의하면, 경력연간(1041~1048)에 필승이 고안해 진흙으로 만든 교니활자로 찍은 책이 최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에 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했다. 1377년(우왕 3) 7월에 주자로 찍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은 실물이 전해지고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유일한 금속활자본이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계미자본, 경자자본, 갑인자본 등으로 자못 괄목할 만하게 발전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져 다양한 책을 찍었다.

목차
정의
활자를 조판하여 찍어낸 책.
내용

이 때 활자는 한 자 또는 관용어를 몇 자 붙여 주조 또는 제작한다. 동의어로 활인본(活印本) · 패인본(擺印本) · 배인본(排印本) · 배자본(排字本) · 일자판본(一字版本) 등이 쓰이고 있는데, 그 가운데 패인본은 우리나라의 문헌에 쓰이고 있는 용어이다.

동양에서 활자본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북송의 경력연간(慶曆年間, 1041∼1048)이다.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따르면, 필승(畢昇)이라는 사람이 고안하여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로 찍은 책이 최초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교니활자는 찰흙으로 만들어서 오래 쓸 수 없었고, 또 조판이 까다로워 실용하지 못하여 하나의 발명작으로 그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에 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창안 시기가 언제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3세기에 주자인쇄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고려의 무신정권이 수도 개성에서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강화로 피난한 1239년(고종 26)에 다시 뒤집어 새겼다는 책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전란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하여 최씨무신정권의 제1인자인 최이(崔怡, 초명 최우(崔瑀))가 직접 간행하게 한 것이다. 새김이 정교하여 13세기 전기의 중앙관서에서 찍어낸 주자본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천도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화로 피난한 뒤에는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국가전례서(國家典禮書)인 50권 거질의 『상정예문(詳定禮文)』을 28부 주자로 찍어 여러 관사(官司)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주자인쇄는 원나라의 지배로 문화와 교육이 위축되자 자연 마비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이르러 원나라가 신흥세력인 명나라에 의하여 북쪽으로 쫓기고, 국내에서 반원사상(反元思想)과 주권의 복구의식이 대두되자, 그 전처럼 서적포(書籍鋪)를 두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에 걸쳐 책을 고루 찍어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를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1392년 정월에 그것이 제도에 반영되어 다시 서적원이 설치되고, 주자인쇄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관주인쇄가 마비되었던 사이에는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사원에서 주자를 만들어 활자본을 찍어냈다.

이것은 중앙관서가 주자인쇄한 불서를 통하여 활자인쇄의 이로운 점을 깨닫고 사찰에서 주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예로서 청주목의 흥덕사(興德寺)에서 1377년(우왕 3) 7월에 주자로 찍은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들 수 있다.

활자의 주조 및 조판기법이 중앙관서의 주자본보다는 확실히 떨어지고 조잡하여 사주본(寺鑄本)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렇듯 치졸한 고려사주본이지만, 현재 실물이 전해지고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유일한 금속활자본인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자못 괄목할 만하게 발전하였다. 태종이 1403년에 첫 번째로 주조한 동활자로 찍은 것이 계미자본(癸未字本)이었다. 고려 말기의 사주본보다 많이 개량되었지만, 아직 기술이 미숙하였다. 그런 조건에서도 활자로 책을 찍어 국내에 실비로 보급하였으니, 인쇄문화사의 시각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활자인쇄의 기술은 세종이 즉위하여 1420년에 두 번째로 개주하여 찍은 경자자본(庚子字本)에서 2단계로 발전하였고, 세 번째로 1434년에 개주하여 찍은 갑인자본(甲寅字本)에서 그 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막론하고 크기를 한결같이 똑같게, 그리고 네모를 평정하게 정성껏 주조하였기 때문에 조판에서 점착성 물질인 밀랍 대신 대나무 등을 깎아 빈 데를 메워 조립식으로 손쉽게 판을 짜서,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

먹물도 진하고 잘 묻게 만들어서 시커멓고 진하며 인쇄가 한결 아름답다. 또한, 이 때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주성하여 갑인자병용 한글활자본을 찍어냈다. 갑인자가 부드럽게 운필된 필서체인 반면 이 한글활자는 강직하게 직선으로 운필된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이 두 활자가 조화 있게 배자된 활자본을 보면, 그 우아정교도는 우리나라의 동활자본 중 백미임을 자랑할 만하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 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져 다양하게 책이 찍혔다. 활자 계보에 오른 금속활자로 찍은 것만도 그 종류가 35종에 이른다.

이들 활자본은 재료가 구리 · 연 · 무쇠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나무와 찰흙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필서체 또는 행서체로서 획의 흐름이 자재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인서체로서 획의 연결이 직선적인 것도 있으며, 또 활자 모양이 크고 획이 굵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모양이 작고 획이 가는 것도 있는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활자본은 중앙관서에서만 찍어낸 것이 아니라 지방관서와 서원 · 사찰과 같은 사사기관, 그리고 특권층에 있는 개인과 민간인들까지, 도처에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찍어 각계각층의 수요를 충당하여 주었다.

특히, 민간이 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책은 그것이 비록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민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고루 찍어 서민의 독서와 면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니,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참으로 크다.

참고문헌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한국금속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한국목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한국서지학 개정증보판』(천혜봉,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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