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량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예조참의, 우승지, 경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간(公幹)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4년(연산군 10)
사망 연도
1582년(선조 15)
본관
영천(永川)
주요 관직
검열|봉교|승정원주서|경기도도사|영천군수|삼척부사|사헌부장령|직제학|우부승지|우승지|경주부윤|영해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예조참의, 우승지, 경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공간(公幹). 통례원봉례 효손(孝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흠(欽)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현보(賢輔)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곧 예문관에 선임되어 1536년까지 검열·대교·봉교 등 전임 사관을 역임하였다. 1537년 세자시강원설서·승정원주서를 역임했는데, 경상도관찰사인 아버지 현보의 관하 수령이 명사를 위한 지대물(支待物) 진상을 상찰(詳察)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파면되었다.

1539년 어머니의 상을 마친 뒤 예문관봉교에 복직되고, 곧 성균관전적에 승진한 뒤 예조좌랑·정언을 역임하였다. 1541년 11월 사헌부지평에 올랐고, 곧 병조정랑·경기도도사를 거쳐 1542년 황해도도사, 이듬해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를 자원하였다.

1549년(명종 4) 종부시첨정으로 입조한 뒤 삼척부사로, 1550년 청송부사, 1554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면서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1557년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사헌부장령에 복직한 뒤 사간·집의를 거쳐, 1559년 특명으로 홍문관에 선임되어 교리·전한·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해 11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하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이후 1561년까지 우부승지·예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5위장을 지냈다. 1562년 상주목사, 1563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뒤 경주부윤으로 옳겼고, 1564년 경주부의 군액이 많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67년 영해부사, 1570년(선조 3) 공조참의, 곧 강원도관찰사에 체직되었으나, 1572년 병사(兵事)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후 명승지를 다니면서 유유자적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과묵하고 겸손했으며, 효행과 학행이 뛰어났다. 20여 년간 외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고, 특히 영해부사 때는 유민 정착에 힘써 칭송을 받았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농암집(聾巖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